고 향 사 람

▲ 김영주씨
김영주씨
성수면 외궁리 원외궁 출신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현대아파트 103-1204
풍진가구(사무용가구/인테리어) 대표
재경성수면향우회 회원

내동산(萊東山) 서쪽 줄기의 성지봉(聖地峰) 아래 활(弓)등성이 같다는 활목재가 있고, 그 아래 큰 골과 심배넘어골이 있어 여기에 상외궁(上外弓)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원외궁(元外弓)마을 위로는 일찍 1932년에 저수지를 만들어 도통리 지역에 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선견(先見)을 보인다.

성지봉 자락에는 산제당(山祭堂)이 있어 마을의 번영(繁榮)과 안녕(安寧)을 기원(祈願)하는 곳 이였으며, 그 아래쪽에는 한증막(汗蒸幕)이 있어 한때는 이곳을 찾는 아낙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기도 하였다. 성지봉은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던 성지였으며, 마을 뒤에는 옛날에 활을 쏘던 사정(射亭) 터와 건너편에는 과녘이 서 있었던 흔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화살촉이 출토되는 등의 흔적만 보인다.

당시 외궁에서 쏜 화살이 시동(矢洞)까지 날아갔다 하여 생긴 이름의 유래가 엿 보인다. 마을 뒤 골짜기에 초빈(草殯:임시로 의짓간 같은 곳에 관을 놓고 ,이엉 따위로 눈비를 가리게 함.)터가 있었으며, 마을 앞에 길게 뻗어있는 앞산 날은 마을을 보호하는 수호산이라 하여 마을에서 규율로 정하여 벌목을 금하였다.

이 산에서 벌목을 하면 재앙이 생긴다는 경험적 유래도 구전으로 전하여 온다. 이렇게 유래와 마을 전설들이 평화스러운 이 마을에서 우리의 고향사람 김영주씨는 1953년11월 18일 김창덕씨를 아버지로 정순예씨를 어머니로 하여 4남1녀의 셋째로 태어난다. 낮은 싸리나무 울타리에 벗되어 피고 피고 또 피어 끈기 있게 피어있는 우리의 무궁화 꽃무리를 그는 쫓아다니며 함께 자랐다.

무궁화 꽃과의 그렇게 시작된 그의 인연은 그리고 지금 장성하여서도 그 무궁화 꽃을 사랑하고 좋아한다. 나라꽃이여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어릴 적부터 그는 무궁화 꽃의 곁에서 함께 자라면서 무궁화 꽃을 사랑하며 살아왔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 해 만 그루 심고 올 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에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이 애환가(愛桓歌)는 단군조선 제16대 위나단군 때의 무궁화 꽃 노래이다. 무궁화 꽃은 환국시대 이래로 나라 꽃 이였으며, 환화(桓花), 또는 천지화(天地花)로 기록되었으며, 꽃이라고 불렀다. 곧 무궁화 그 자체가 오늘날 꽃이란 이름의 기원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선영(先塋)은 성수면 중길리에 있으며, 가족묘역(家族墓域)은 마령면 덕천리에 자리하고 있다. 설명하는 김영주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인간의 영고성쇠(榮枯盛衰)와 은수(은혜와 원한)의 값(價値)에 관하여 그 척도(尺度)의 한계(限界)와 기준(基準)에 시대(時代)의 의미(意味)를 접목시켜 생각하면서 상당(相當)한 혼돈(混沌)에 젖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영주씨의 아버지 김창덕씨는 제1공화국 시절, 초대 민선 면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아직도 그의 고향에서는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 성수면의 유지(有志)급 인사(人士)로 분류되는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 성수면에는 그의 아버지 공덕비(功德碑)도 세워져 있어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지나간 1950년대 이 나라의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있었던 민족의 그 갈등은 과연 무엇인가, 산골, 산골까지 총성으로 몰아넣어, 들판, 들판마다 초연(硝煙)의 사격전으로, 밤에는 좌익공화국이, 낮이면 민주공화국이, 인간의 생명이 파리 목숨 같았던 그 시대, 그 어둠속에서 있었던 흥정들이 얼마나 이념(理念)에 충실한 사람들의 행위였겠는가. 45년 해방을, 48년 정부수립도, 50년 동족상잔이, 9,28수복 이후 만덕산, 내동산, 방미산등의 빨치산 잔당들도, 그들을 토벌하는 전투경찰 결사대들도 전쟁을 끝내고 보니 모두가 내 이웃들이였다.

역사의 흐름이 어찌 되었건, 김영주씨는 그 속에서 조상 때부터 타고 난 가난을 안고 성장해갔다. 외궁초등학교를 마치고 전주서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끝내 그는 학업을 마칠 수가 없었다. 김영주씨는 요즘 지상에 나타나는 학력위조사건에 연류된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술회 할 만큼 그도 그에 관한 많은 유혹을 받아 온 과거를 생각한다. 김영주씨가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찍 연애로 결혼한 그의 아내 김기순(54년생, 김제)씨와 더불어 고향에서 반거충이 생활로 세월을 낚고 있었던 그에게 아버지와 아내의 충고와 행동은 그에게 촉매제가 된다. 아내가 먼저 상경하여 거처를 마련하는 동안 일년의 세월, 두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현재를 읽으면서 현재의 이산가족의 자신의 운명에 관하여 반성하고 반성한다. 1987년 비원 앞, 행랑 채, 문간 방, 네 식구 단 간 월세 방. 그의 현 주소였다.

아내는 친척집 언니의 이불공장의 공원으로, 그는 가구점의 영업사원으로. 두 아이를 위하여, 또는 우리의 장래를 위하여, 그들 내외는 열심히 세상을 살았다. 배신과 유혹도 받았지만 사기의 그 사회에서 그는 이기고 오늘의 사무용 가구와 인테리어에 몸 담은지 20여년. 사무용 가구 관급납품에 그는 지나간 세월의 꿈을 일군다.

거기에 그의 모든 의지를 걸고 부끄럽지 않는 가장으로 남편으로, 그리고 아버지로, 또는 사회의 일원으로 이 풍진 세파를 헤쳐 간다. 우리의 고향사람 김영주씨. 그는 아버지의 영혼이 배인 고향의 산하를 사랑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를 존경한다. 그는 그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마다 그 역할을 다해준 그의 아내를 사랑한다. 그는 그가 다시 태어나도 그 아내를 사랑 할 것 이란다.
(김영주씨 전화번호 : 011ㅡ290ㅡ5311)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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