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26) 동향면 신송리(4)…수침

▲ 골짜기마다 이름과 전설이 있다는 아흔아홉 골짜기가 수침마을 주변으로 뻗어 있다. 수침마을에 평생을 살아도 골짜기를 모두 알 수 없다는 얘기가 전할 정도다.
동향면 신송리 ‘수침(水砧)’은 물레방아에서 비롯된 지명인 모양이다. 마을 위쪽으로 ‘물레방앗골’이란 지명이 있고, 수침의 ‘침(砧)’ 자가 ‘다듬잇돌’이란 뜻이 있는 것으로 추리해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 누구도 마을에서 물레방아를 보지는 못했다. 아주 옛날부터 전해진 이야기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다.

마을에는 열 가구 정도에 20여 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 노인 혼자 살거나 노부부가 지내고 있다. 나이가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 많지만 대부분이 논과 밭에서 일을 한다. 어떤 수익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고, 자신들이 먹을 것과 자녀들에게 나눠줄 것을 짓는 것이 대부분이다.

갑자기 추워졌던 날씨가 한결 포근해진 10월22일 수침마을을 찾았다. 동향면 소재지에서 내유마을을 거쳐 수침마을로 들어가면서 보이는 논은 이미 추수를 끝낸 뒤여서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다.
마을 근처에 도착하자 도로가 좁아지고, 마을 어귀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수문장처럼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

▲ 동향 신송리
◆공무원이 많이 나는 마을
마을 아래쪽에는 비교적 넓은 터가 있다. 이곳 가장자리에서 박근순(77)씨가 타작한 벼를 널고 있다.
“올해는 볕이 안 나서 나락이 가늘어요. 비가 많이 와서 다 쓰러지고 애를 많이 먹었어요.”

벼를 다 널고 포대를 정리하던 박씨는 올해 콤바인으로 45포대를 수확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자신이 먹거나 자녀들에게 나눠줄 것이라고 했다. 요즘엔 쌀값이 좋지 않아 매상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마을이 공무원이 많이 나왔어요. 인근 마을에서 가장 공무원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고 해요. 우리 아들도 군에 있다가 정년퇴임 했는데, 손자도 한국전력에 들어갔어요. 다른 집들도 공무원이 더러 있어요.”

박근순씨가 일하던 곳 옆으로 모양새가 범상찮은 나무가 서 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저 나무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다고 해요. 가지가 멋있게 뻗었잖아요. 그런데 저 나무 아래쪽으로 있는 집이 파손 위험이 있다고 조치를 취해준다고 했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네요.”
  

▲ 동향면 신송리
◆먹고살기 괜찮았던 마을
수침마을의 주요 작물은 벼와 고추였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수박을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올해 수박으로 재미를 본 농가가 조금 있는 모양이다. 내년에는 더 많은 농가에서 면적을 확대해 수박을 재배할 거라고 한다.

그런데 수침마을은 농작물보다 가축이 잘 되는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마을에 들어가 보면 황소를 키우는 축사를 여럿 볼 수 있는데, 규모가 작지 않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볕이 잘 드는 마을의 지형적 특성과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이 가축 사육에 적합한 모양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수침마을은 예전에도 먹고사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동네였다고 한다. 특별히 못사는 사람 없이 두루두루 잘 살았던 모양이다. 실제 비어있는 집까지 따져보면 마을 규모도 큰 편이고, 골짜기 골짜기로 농사를 지었던 흔적을 보면 풍요롭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게 살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 마을 뒤 산자락을 따라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하지만, 요즘엔 맷돼지를 비롯한 산짐승 때문에 1년 농사를 망치기 일쑤다.
◆“돼지 좀 잡아줘요!”
사방이 산이기 때문에 산짐승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돼지 때문에 못살겠어요. 잡지도 못하게 하고 말이에요.”

나락을 널던 정영순(62)씨가 하소연했다. 꿩과 산비둘기, 노루, 멧돼지 할 것 없이 수시로 논과 밭으로 내려와 쑥대밭을 만들기 때문이다. 올해는 멧돼지가 뒹굴어 논의 1/3이 엉망이 됐다. 많은 비 때문에 그러잖아도 신통치않은 농작물 수확량이 산짐승 때문에 더욱 줄었다.

“주로 밤마다 내려오는데, 논밭에서 무얼 막 두들겨서 쫓아내면 그때만 잠깐 도망갔다가 금방 다시 내려와 해코지를 해요.”
  

▲ 동향면 신송리
◆꿀 따러 들어와 10년
이동춘(60)씨는 수침마을에서 400여 개의 벌통을 두고 토종벌을 치고 있다. 본래 남원에서 벌을 치다가 겨울철 추위에 벌이 죽자, 벌을 치기 좋은 곳을 찾다가 들어온 곳이 수침마을이다.
그렇게 수침마을에 들어와 벌을 치기 시작한 것이 10년이다.

“한봉이라는 게 완전 상노동이예요. 벌 치는 사람치고 허리 안 아픈 사람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이 나이에 다른 일을 하기는 힘들고, 하던 일을 꾸준히 하는 게 났잖아요.”

토종벌은 서양 벌에 비해 작고 약해 관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또 양봉처럼 밀원을 찾아 전국을 돌며 꿀을 따는 게 아니기 때문에 꿀 수확량이 특별히 많지도 않다. 올해는 특히 비 오는 날이 많아서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벌 치는 게 농사하고 똑같아요. 날씨가 중요하고, 잔손이 많이 가거든요.”
  

▲ 수침마을의 많은 전설과 지명에 대해 이야기해 준 윤정식씨. 논에서 일을 하다 약속이 있어 집에 잠깐 들른 차였다.
◆전설 가득한 아흔아홉 골짜기
수침마을은 수침정미 제제창세(水砧精米濟濟蒼世)라고 해 동향팔경(銅鄕八景)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만큼 주변 풍경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위상에 걸맞게 각 골짜기는 독특한 이름과 전설을 담고 있다.
골짜기와 관련한 이야기는 윤정식(74)씨를 만나 들을 수 있었다.

“물방아골은 이야기만 전해지는데, 그 위로 받침골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물레방아가 있던 게 분명해요.”
또 받침골 위로는 안골과 배나무뻔더기(배나무번덕이)라는 지명도 있다. 특히 배나무뻔더기는 ‘물이 차서 배가 산으로 넘어간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수침동 너머 절골(부곡)의 지형이 배 형세를 띄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마을 앞쪽 골짜기로는 최변골이라는 곳도 있다고 한다.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며칠간 그 시체를 썩힌 후 묘지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골짜기 전설의 백미는 빡주골(빡쥐골, 박쥐골)과 각씨쏘와 신랑쏘이다.

빡주골은 그 안에 박쥐가 산다고 해 붙여진 동굴 이름인데, 그 안에는 쇠로 만든 베틀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베틀을 들고 나오려고 해도 도저히 들고 나올 수 없다고 한다. 또 빡주골 안 천장에서 떨어지는 몸을 치료하는데 사용하는 ‘약’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실재 그 물을 복용하는 이는 없다.

▲ 마을 초입의 넓은 터 가장자리에 박근수씨가 수확한 나락을 널고 있다. 박씨는 수침마을이 인재가 많이 나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얘기했다.
각씨쏘와 신랑쏘는 빡주골과 관계있는 전설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마을로 쳐들어왔을 때 주민들은 빡주골에 들어가 숨어지냈다고 한다. 그때 주민들 가운데는 신혼부부가 있었는데, 빨래하러 잠깐 나간 각시가 왜군에 쫓기다가 주민들이 있는 숨어 있는 곳을 알리지 않으려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각씨쏘’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죽은 각시의 남편은 각시를 찾아 헤매다 물에 빠져 죽었는데, 후에 이곳을 ‘신랑쏘’라고 불렀다.

“우리 마을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 내가 살아오면서 누구 하나 사고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경우가 없었거든.”

한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단다. 한 주민이 경운기를 타고 가는데 경운기가 길 옆 절벽으로 구른 것이다. 다행히 사람은 탈출해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그런데 후에 경운기를 절벽 아래에서 건져 올렸더니, 경운기 역시 멀쩡했다고 한다.

또 이런 일도 전해진다. 사냥꾼들이 들어와 산에서 짐승을 사냥하는데, 아무리 조준을 잘하고 쏴도 맞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목숨을 해하거나 목숨을 잃지 않는 명당이라는 얘기가 전해졌단다. 이 밖에도 히딤이, 매산이골, 벼락맞은바우, 부채바우 등의 골짜기 및 바위 이름도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요즘엔 사람이 근방으로 다니지 않아 길이 없어지고 수풀이 우거져 접근하기가 어렵다.

“여기 살아도 아흔아홉 골짜기를 다 모른다고 해요. 그만큼 골짜기가 많아요. 그런데도 전부 이름이 있으니 참 신기해요.”

▲ 동향면 신송리

▲ 동향면 신송리

▲ 마을 약도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