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2>
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역사는 인간의 자기인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 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일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자기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의 가치는 인간이 무엇을 해 왔으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데 있으며, 역사의식(歷史意識)이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각(自覺)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 말엽 충정왕 때의 좌승정 이암(李?,1296ㅡ1364)은 단군세기(檀君世紀) 그 머리말에서 ‘爲國之道莫先於士氣莫急於史學何也史學不明則士氣不振士氣不振則國本搖矣政法竝矣盖史學之法可貶者貶可褒者褒衡量人物論診時像莫非標準萬世者也斯民之生厥惟久矣創世條序赤加訂證國與史?存人與政俱擧皆自我所先所重者也.’라 하였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 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일가.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선비의 기세가 펼쳐질 수 없고 선비의 기세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다스림이 법도에 맞지 않다. 무릇 올바른 역사학은 나쁜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 사람을 저울질하고 세상을 이야기 하니, 이 모든 것이 세상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 백성이 생긴 지도 오래 되어 세상이 열린 이래의 여러 가지 질서도 많이 변화하였다. 나라와 역사는 나란히 이어지며 사람과 다스림도 따로 나뉘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모두가 한 개인보다 먼저 생각해야 되고 또 소중하게 생각해야 됨이라.」

진번·조선이 기원전 194년 동이족의 모습을 한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멸망하여 고조선이 문을 닫기 이전의 단군조선의 이야기는 조선건국 신화로써 잘 알려져 있거니와 건국신화의 그 경위가 환웅의 강림, 단군의 탄생, 조선건국, 단군의 최후라는 절차로 그 신화가 갖는 의의로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이념을 강조 한 것은 하늘의 자손으로서의 민족적 긍지와 민족의 역사성과 단일민족으로의 우수성을 밝히려는 노력이다.

단군왕검은 나라를 세우면서 참전계경(參佺戒經)을 통하여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는 단군칙어(檀君勅語)를 백성들에게 가르침으로 ①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한얼님의 자녀 됨을 알아라. ② 너희는 영원토록 자손이 계승할 때에 터럭만한 것이라도 다침이 없고 이즈러짐 없어라. ③ 너희는 한 겨레로 일체가 되어 의좋고 정답게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살아라. ④ 너희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내 땀방울이 적시우고, 내 피가 물들인 강토에 혹여나 더러운 때 묻힐세라.

⑤ 너희는 내가 해야 할 일은 너희 손으로만 하게 하라. 그리하여 너희 할 직분을 지켜라. 너희 할 책임을 견뎌라. ⑥ 네가 가질 것은 남에게 주지 말고, 네가 할 일을 남이 하지 말게 하라. ⑦ 너희는 이 나라 기슭, 한 군데도 빠짐없이 하늘 은혜와 땅의 이익 두루 받았음을 알라. 너희 것 삼아 쓸데로 써서 너희 생활이 항상 풍족하거라. 넉넉하거라. ⑧ 너희는 내가 오늘 훈칙한 이 알림이 할 일로서 천하 만민에게 고루 알리어 주거라. 이렇게 내려 주었다.

첫 민족국가로서 정신적 상징으로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塹城壇)을 쌓고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 5월 단오제, 10월 상달제, 이러한 때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민족의 근본에 감사하였다. 고조선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 이였으며, 유목, 사냥, 고기잡이, 채집등이 병행되었으며, 교환경제가 발달하여 쌀되와 저울 등, 교환의 기준을 위한 도량형이 통일되어 있었으며, 패전, 패엽전, 공방전 등의 화폐문화도 이루어졌으며, 공창(工廠)을 건설하여 종이, 베, 선박 등을 생산하기도 하였으며, 농업국가의 기본인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성공하여 기원전 2238년에는 홍수로 10여 년간 고생하고 있었던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에게 그 지식을 전수(傳授)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정신문화에서도 경제적으로도 중국을 앞서가는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단군조선의 영토(領土)는 치대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 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산서성, 성서성, 강숙성, 호북성, 호남성 등)까지, 그리고 최소 만주대륙 전체와 한반도의 전역에 걸친 동북아시아 대륙을 통일한 민족국가였던 것 같다.

중국의 역사가 한결같이 하나의 왕조가 300년을 지속된 나라가 없었으나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열국으로 분열하여 힘이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 그 왕조의 변화 속에서 팽창을 계속하여 종종 우리 민족을 침범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왕조들은 한족(漢族)만의 역사가 아니고 동이계열(東夷系列)이거나 거기서 갈라져 나간 유목민족의 왕조였다.

이렇게 중국의 역사는 한족(漢族)에 의한 왕조와 동이족(東夷族) 출신의 유목민족(遊牧民族)에 의한 왕조(연(燕), 수(隨), 위(魏), 원(元), 요(遼), 금(金), 청(淸)등)간의 투쟁사였던 것 같다. 진시황, 당태종, 명태조 들도 알고 보면 다 동이족(東夷族) 계열의 왕들이다. 동북아시아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은 이렇게 몽고, 말갈, 흉노, 선비, 돌궐 등의 주변국의 나라들과 때로는 통치하고, 때로는 적국으로, 때로는 유민으로, 때로는 속국으로, 때로는 이웃으로 참으로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것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古朝鮮)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고조선의 건국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으며, 후일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지금도 고조선이 우리에게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지금은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통칭하여 고조선으로 이해한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나타난 것은 7세기 초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흔적이 있으며,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발해만(渤海灣) 북쪽에 있었던 나라로 기록하고 있다.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보면 한족(漢族)은 연(燕)나라 때부터 일찍 진번·조선(眞番?朝鮮)을 침략해 이를 차지하고, 관리를 두어 지키며, 변방에 요새를 쌓았다. 이 후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번·조선을 요동의 변방에 예속시켰다. 한(漢)나라가 서자, 이 땅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에 옛 변방의 요새를 고쳐 쌓고, 패수(浿水.청천강)를 경계로 삼고, 진번·조선을 연나라에 예속시켰다.

연나라 왕 노관이 한 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의 나라로 들어갔다. 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여 무리 천명을 이끌고 요동변방의 요새를 떠나, 동쪽으로 달리어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터, 위아래 변방요새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점차로 진번·조선의 오랑캐와 옛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 해 온 사람을 받아들여 왕이 되어, 도읍을 왕검(王儉)에 정했다.

그러나 또 다른 위만조선의 실체를 정리하고 이 글의 시원치 않은 매듭을 짓자.
위만은 원래 낳은 해와 죽은 해조차 확실하지 않은 역사의 인물로서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위만조선을 세운 이물이다. 당시 조선의 정변으로 인접한 요동군에 큰 충격과 불안을 주매, 요동태수는 위만에게 한 나라의 외신(外臣)이 될것과 요동 새외(塞外)의 만이(蠻夷)가 한나라의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할 것, 만이의 제군장(諸君長)이 천자(天子)를 입견 하려고 할 때 그 것을 막지 말 것 등을 맹약하게 하고, 이의 대가로 위만 한나라의 병력과 물자를 원조 받았으며, 그 것으로 이웃의 진번과 임둔 등, 소읍을 처서 자기 지배하에 넣어 그 땅이 수천리에 달하였다.

위만이 죽고 손자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나라와의 대립과 내부의 배반 등, 기원 전 108년 한나라 무제(武帝)의 동방침략(東邦侵略)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이렇게 조선을 평정하고 이 땅을 나뉘어 진번군(眞番郡),임둔군(臨屯郡),낙랑군(樂浪郡),현토군 등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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