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강칠성씨
강칠성 씨
안천면 삼락리 안자동 출신
안산시 부곡동 696-3(302)
무지개이벤트 대표
재경안천면향우회원

가끔씩 날이 궂어 장터를 닫는 날, 강칠성씨의 모처럼 한가한 그 객창한등(客窓寒燈)의 서린 여수(旅愁) 속에 스며오는 어떤 그리움은, 고향의 수몰된 옛집의 그 그리움에 젖어서 산수(傘壽)의 고독(孤獨) 속에 함께 계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죄스러움과 그리움이 그의 가슴에 함께 함일 것이다.

아니면 스물네 살 어린 나이에 그에게 시집와서 이십년이나 더 넘게 함께 고생하면서도 고생스럽다 생각하지 않고, 두 아들 딸 잘 길러주며 주말 부부처럼, 또는 이산가족처럼, 그렇게 살면서도 내색 없이 불평 없이 살아 준 그의 아내 이선숙(고산,45)여사에게 향하는 연민(憐愍)의 그리움일 것이다.

자고로 중국의 도가(道家)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욕망을 일러 명예(名譽)와 지위(地位)와 재물(財物)이라 하여 이를 삼욕(三欲)이라 하였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명예뿐 아니라 권세까지 누리려고 한다. 권세를 가진 사람은 명에뿐 아니라 재물까지 가지려 한다.

도가에서는 이것이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라 지적한다. 강칠성씨는 도가의 그 이치가 무엇인지를 터득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가 타고 난 그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성질대로 닥치고 지나간 고생들을 고생이라기보다 좋아서 하는 재미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강칠성씨는 안천면 삼락리 안자동 그의 고향에서 아버지 강한수(80세)씨와 어머니 김정예(78세)씨 사이에서 1959년 9월에 4남6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안자동(顔子洞)은 원래 용담군 일북면 하안천이였던 것이 1914년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안자동으로 되었고, 안천골, 산수골, 안자동, 안락리, 안천동으로 불리어 왔다.

이렇게 산수골은 마을 본래의 자리로서 으뜸의 본뜸으로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말로만 들어오던 수몰에 밀려 이웃들이 함께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저 갔다고 강칠성씨는 그렇게 회고한다.

그가 지금 팔순(八旬) 부모님의 그 연세에 고향을 떠나 전주에 함께 살고 계시는 부모님께 죄스러운 마음으로 항상 용서를 비는 그 마음은 10대적(十代的) 축낸, 집안의 재산과 심지어 수몰보상금으로 받아 두었던 그 재물을 그가 축낸, 그래서 걱정으로 부모님께 끼쳐 주었던 그 행위들에 대한 속죄라고 고개를 숙인다.

전주시 노송동 속칭 진안사거리 시절의 그의 모든 민망한 행위들은, 이후 그가 살아 온 모든 행적으로 속죄하고 있음을 지켜 볼 수가 있다. 그는 지금 당당하게 이웃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는 남을 마음 아프게 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고 다짐하며 살아간다. 그는 결코 독하지 않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는 이웃에게 지키는 의리를 제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는 최인호씨의 상도(商道)에서 의주상인(義州商人)임상옥(林尙沃)의 이야기를 읽고부터 임상옥의 깊은 뜻을 마음에 새긴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없는 최고의 이윤이며,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없는 최대의 자산인 것이다. 장사는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장사.’ 라는 임상옥이 평생을 거쳐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지켜나간 그 깊은 뜻을 그가 그의 마음속에 새기는 것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모든 이웃이 함께 하여야 한다는 그의 굳은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무지개 이벤트. 거창한 이름이 아니다. 강칠성씨는 30여종의 상품으로 짜여진 50여명 정도의 상단(商團)을 꾸려 3일씩, 또는 일주일씩 서울이거나 서울주위의 위성도시를 돌며 짚시처럼, 때로는 유랑하는 무리처럼 그렇게 낭만을 짊어지고 돈을 따라 떠돈다. 팔도(八道)의 미락(美樂)을 앞세우고, 의류와 공산품, 드팀전(온갖 피륙을 파는 가게)의 옷감들과 피륙, 포목, 아이디어제품들을 진열(陳列)한다.

아파트의 공터에서, 중소기업전으로, 국가기관, 공공기관의 바자회, 성당, 교회의 바자회로, 이렇게 그의 영역은 넓고 다양한 말하자면 장돌뱅이 인생의 현대판이다.

꽃이 만발하는 계절가고 휑한 바람 부니/부초처럼 떠돈 한 많은 세월 무심코나
어디메요 어디메요 내가는 곳 어디메요/텅 빈 저자거리 위로 초저녁별만 반짝인다.
내 어릴 적 장대 들고 별을 따던 손엔/의미 없는 욕망으로 찌들어진 나날들이
푸르고져 푸르고져 내 쌓은것 무엇이요/하늘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길빌던 영혼의 노래
슬기로운 영혼은 어김없이 타야할 꽃마차의 꿈꾸시며/얽히고 설킨삶의 애증들을 두시겠지
뉘말할가 뉘말할가 내 이룬것 영원하다/한끼면 족할 우리삶이 움켜쥔것 무엇이요
우리의생은 단한번 핀 섧도록 고운꽃이구나/취해도 좋을삶을 팔고찾는 장돌뱅이로 떠도네
가야겠네 가야겠네 이땅을 위한 춤을추며/어우야 넘자 어우야 넘자 새벽별도 흐른다.

우리의 고향사람 강칠성씨. 그의 상단(商團) 무지개 이벤트. 그들은 그렇게 곽성삼 선생이 작사하고 작곡하여 불러 준 이 장돌뱅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도 타향에서 타향으로, 이 장에서 저 장으로, 달을 벗 삼고 별을 벗 삼는다.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베개 삼아, 물결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또 간다. 후세에 다시 만나도 다시 사랑할 것이라는 그의 아내와는 멋모르고 살았던 십대를 생각하며, 이십대에는 아기자기 살았을것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던 삼십대를 지나, 버릴 수 없는 서로의 사십대를 살았으니, 이제 성숙한 서로를 연민(憐愍)하며 살아 갈 것이다. 두보(杜甫)는 그의 시(詩)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다지 않은가. (강칠성씨 전화번호: 010ㅡ9035ㅡ2223)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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