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4)
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주몽의 탄생은 우리나라 난생신화(卵生神話)의 시초를 기록한다. 주몽은 자라면서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기골이 준수하고 재략이 특출 났으며 활을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 하였고 말(馬)타는 기술도 능통하여 신동이란 별명을 얻었고, 당시 나라의 풍속에 활의 명수를 소위 주몽(朱蒙)이라 부르는 것에 연유하여 그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금와(金蛙)왕 에게는 아들이 일곱 명이나 있었는데, 언제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일곱 모두가 주몽의 재주를 따르지 못 하였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금와왕에게 말한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것이 아니니, 만약 일찍 없애지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금와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마굿간에서 말을 기르는 일을 시켰다. 주몽은 말을 제대로 구별 할 줄 알아 좋은 말은 일부러 적게 먹여서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을 잘 먹여서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진 말을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그 후 왕의 여러 아들들과 그에 따르는 여러 신하들이 주몽을 시기하고 죽이려 하므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은 그것을 눈치 채고 주몽에게 말한다.

“나라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니, 여기를 빨리 떠나거라. 네 재능과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이에 주몽이 오이(烏伊)등 세 사람과 함께 도망하였다. 마침 엄리수(奄利水;지금위치 미상)에 이르러 강물을 향해 주몽이 외친다.

“나 주몽은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유화부인의 아버지)의 외손(外孫)이다. 지금 나를 죽이려는 자들을 피하여 도망을 가는데 나를 뒤쫓는 자들이 닥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하였더니, 물속에서 잉어와 자라가 올라와 다리를 만들어 주몽과 그 일행을 건너게 하고 곧 흩어지니 뒤쫓는 기병(騎兵)들은 닭 쫓던 개의형색이였다.

주몽이 졸본(卒本)에 도읍하여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본성인 해(解)를 버리고 고(高)로서 하였다. 이상의 동명왕(東明王) 개국설화(開國說話) 말고도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주몽은 북부여 사람으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왔는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는 부여 왕이 주몽의 비범함을 보고 둘째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아, 후에 부여 왕이 죽자 그 왕위를 계승 하였다는 설화와 함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기(高句麗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평주(東明王篇註)》등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가 유화(柳花)이며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점과 졸본에서 건국하였다는 내용은 앞에서 밝힌 기록과 같으나, 주몽의 어머니가 햇빛을 받기 전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에게 유인되어 욕을 당하였다는 점과 유화를 방에 가둔 것이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이였다는 점, 그리고 주몽이자란 곳과 죄를 지은 곳이 동부여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이 다르다.

주몽의 탄생설화에서 햇빛이 유화를 쫓아다니면서 비춘 것은 하늘과의 연관이 지속 되었음을 의미하고 주몽이 졸본주에 도읍하고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면서 본성(本姓)인 해(解)를 버리고 고(高)를 그 성(姓)으로 삼은 것도 주몽이 천제의 아들로서 햇빛을 받고 낳았다 하는 이유에서였다.

신화라는 것이 초기에는 그 인물에 대한 정통성, 경외심을 위해 만들어 졌다면 후세로 갈수록 국가 체계의 명분, 방향성 제시를 위하여 이용된다는 점에서 강력한 왕권강화를 위한 명분이 필수적 이였던 것 같다. 강물(하백)과 태양(해모수)으로 후계자로 하여 세워진 주몽의 고구려 그 전통성과 당위성이 주몽신화의 명분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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