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한호종씨
한호종씨
안천면 노성리 하보마을 출신
(주)나이스 유통 대표
강동구 의용소방대장/한마음산악회장 역임
재경안천면향우회장 10년 역임
안천초등34회/안천중 14회 동창회장
재경진안군민회 이사, 감사, 부회장 역임
재경진안군민회 자문위원

어버이 사라신제 셤길일란 다 하여라
디나간 휘면 애닳다 엇디하리
평생에 곳텨 못 할 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조선시대 송강(松江) 정철(鄭撤)의 효에 관한 애절한 시조를 읽으면서 한호종씨는 항상 깊은 명상에 젖는 때가 많다.

풍수지탄(風樹之嘆:어버이가 돌아가시어 효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슬픔을 이르는 말.)이라 하였다던가? 그는 철없던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이고 그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 하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단 두형제가 의지하며 살았다. 형과 함께 군에 복무 중 그들 형제에게는 하늘같던 그 어머니는 형제의 임종 없이 그렇게 세상을 뜨셨다.

그 후 그들 두 형제는 큰 어머니를 어머니 삼아 고아(孤兒)의 한(恨)을 함께 이기면서 그렇게 서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의지하고 살았다. 그 형마저 수년전 그는 임종을 지키지도 못한 채 또 그렇게 객지에서 세상을 뜨셨다.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뉘 손에 타 나관대 양재조차 가타산다/한 젖 먹고 길러 났으니 다른 맘을 먹지 마라.」

이 세상에 단 하나였던 그 혈육, 그 형의 주검을 보내면서 한호종씨는 아,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그렇게 오열(嗚咽)하며 통곡(痛哭)했다. 요즘 그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그 외로움이 뻥 뚫린 가슴속의 시린 허적함으로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한호종씨.
그는 1946년 5월 해방정국의 그 혼란 속에서 아버지 한태규씨와 어머니 성초순 여사의 두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훈육 밑에서 외롭고 어려운 그런 모습이었다. 안천초등학교와 안천중학교를 마치고 배구선수로 스카우트되어 익산의(당시 이리) 남성고등학교에서 배구선수로서 학교를 마친다.

그리고 잠시 고향에 머무는 동안은 당시 유행처럼 번져가던 4H운동에도 투신했고 또 당시 가을이 되면 들판에 포장을 치고 상영하던 가설극장의 뒷일도 도우면서 그렇게 세월을 허송하기 몇 년, 그가 그 고향을 그렇게 떠나고 그 후 수몰된 고향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 한 번의 향수의 설움을 익힌다.

당시의 4H활동의 그 경험이 지금 서울의 타향살이에서 재경향우회의 참여와 고향사랑의 마음가짐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그는 그렇게 회고한다.

지금은 수몰되어 추억의 고향이 되었지만 그의 고향 하보(下保)마을은 원래 용담군 이북면 보한리 지역이었다. 중뜸, 양지편, 잔골, 보짝거리 등의 뜸으로 이루어진 누에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국의 잠두혈(蠶頭穴)이라 부르는 동산 기슭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그런 마을 이였다고 그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보교 근처의 물레방아 돌아가던 그 사연도, 큰 샘물 위쪽에 있었던 연자방아 내력도, 마을 중간쯤 풋보리방아를 찌어쌓던 디딜방아의 그 이야기들도 그는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향마을에 미련을 버리고 그가 서울행에 용기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의 현실적 외로움과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그리움과 그리고 그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 이였을 것이다.

서울에서의 초기 그의 생활은 모든 고향사람들이 지나갔듯이 그런 과정 그것 이었다. 노동판에도 단추공장에도 여러 계통의 견습공으로도 그는 그렇게 헤매고 또 다른 이들이 했었던 그 허기도 느꼈고 고생도 했었고 그 인고의 세월도 이겨 냈다. 강동구 (당시는 성동구)의 큰 어머니의 배려가 있었기에 그 고생이 짧고 적었을 뿐임을 기억하고 있노라 그랬다.

당시 단추공장 이였던 서울공업사에 재직중이였을 때, 성동구직장대항배구대회에 회사대표로 출전하여 파이롯트 배구팀에 스카우트되어 8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천호동의 동신중학교의 배구코치로, 군 시절에는 양수리의 양서초등학교의 배구코치로 초빙되어 배구인생 으로서의 적지 않는 세월을 그가 보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살아오던 한호종씨가 플라스틱 계열 잡화회사 경기상사의 채권관리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익힌 노하우를 활용하여 경기상사를 접수하고 서울유통을 인수하여 발전시키기까지의 십 수 년의 그 세월을 그는 잊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올 적, 애당초 그는 고향에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그 아무도 없는 고향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가끔씩 어울려 노래방에 들릴 때면 부르는 레퍼토리가 그렇다. 「못 잊어서 또 왔네, 미련 때문에」 그의 그 미련은 그리움으로 서울에 고향의 향우회를 만들고 그것을 끌고 가는데 그의 열과 성 그 모든 것을 다 바친 것이다.

우리의 고향사람 한호종씨.
그는 사람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그 고향의 그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그는 그가 외로운 사람임을 항상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꿈속에서도 그 잊을 수 없는 수몰된 고향을 찾아서 항상 그 용담댐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구초심(首丘初心)― 그의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인생이 덧없다 하더라도 그는 그러 할 것이다.
그는 자타가 그렇게 인정하는 우리시대 마지막 풍류객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한호종씨 연락처: 010―5271―5747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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