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조대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 일찌기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 한다.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龍光)의 검을 차고 오룡(五龍)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500여명 이였는데 아침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엔 하늘에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管境)이 교화 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B.C 239)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정(政)의 8년이다.

고리군(藁離郡)의 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함에 있어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 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柳花)를 만나 즐겨 그녀를 맞아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년(B.C 199) 5월 5일이라. 한 나라 왕 불능(弗陵)의 원봉(元封) 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 왔으니 지금의 서란(舒蘭)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 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함께 잉어와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졸본으로 도망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또 이렇게 이어간다.
“주몽의 일행이 엄사수(奄利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표기가 각각 다르며 삼국사기에서는 개사수(蓋斯水)로도 표기하고 있으며 지금 압록의 동북쪽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에서 어별(魚鼈)들의 도움으로 물을 건너 추병(追兵)들을 닭 쫓던 개처럼 따돌리고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세 남자를 만나는데 한사람은 마의(麻衣)를 입고, 한사람은 납의(衲衣)를 입고, 또 한사람은 수조의(水藻衣)를 입었다. 주몽이 묻는다.

“그대들은 어떠한 사람이며 성과 이름은 무엇이라 하는가?”
마의를 입은 자는 재사(再思)라 하고, 납의를 입은 자는 무골(武骨)이라 하며, 수조의를 입은 자는 그의 이름을 묵거라 하나 성씨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克)씨를, 무골에게는 중실(仲室)씨를, 묵거에게는 소실(少室)씨를 주며 동행한 여러 사람에게 말한다.

“내가 천명(天命)을 이어 받아 나라의 터전을 열려는데 오늘 세 사람의 현인(賢人)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의 주심이 아니겠는가?”하며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자의 소임을 맡기고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다다르니 그 땅이 비옥하고 경치가 아름다웠으며 산하는 험난하고 견고하니 그들은 여기에 도성을 정하고 아직 궁성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우선 비류수 가에 집을 짓고 살며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주몽의 성씨를 고(高)씨로 삼았다.

【일설에 이르기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니 그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주몽을 보고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주었으며,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어쨌던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이니,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健昭) 2년, 신라(新羅)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였다.
또 《주림전(珠琳傳)》21권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시비(侍婢)가 임신했는데 관상을 보는 이가 점을 쳐 보더니 왕에게 말했다.
“귀하게 되어 왕이 될 것입니다.”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된다.”
시비가 아뢰었다.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임신한 것입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굿간에 버렸더니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 않았다. 마침내 이 아이가 자라서 부여의 왕이 되었다.

이는 곧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이르는 것이다.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다른 도읍이기 때문이며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이름이다.

주몽은 재위 19년 가을 승하하니 이때 나이 40세였으며 용산에 장사하고 그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十九年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며 휘는 주몽, 추 또는 상해라고도 하였다. (姓高氏 諱朱蒙(一云 鄒, 一云 象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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