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주몽이 금와왕의 왕자들에게 쫓겨 북부여를 탈출할 즈음, 그의 첫 부인인 예씨는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주몽은 예씨부인에게 이렇게 이르고 떠난다. “그대가 남자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되 내가 유물을 칠릉석(七稜石: 일곱 모가 난 돌)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능(能)히 이것을 찾는 자가 나의 아들이라고 전해주시오.”라고 약속했다.

그 후 태어 난 유리가 어린 나이에 밭두둑을 돌아다니며 새를 쏘다가 잘못하여 물 긷는 여인의 물동이를 깨뜨리니 여인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애비가 없이 함부로 자라서 이처럼 완악하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러워 집에 돌아 와 어머니 예씨부인에게 묻는다. “나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씨부인이 대답한다. “너희 아버지는 보통분이 아니시다.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개척하고 왕이 되셨단다. 떠나실 때 내게 이르시기를….” 주몽의 이야기를 유리에게 전한다. 유리가 듣고 이내 산곡(山谷)을 헤매며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지쳐 돌아오기를 수차례, 어느 날 생각에 잠겨 마루에 앉아 있는데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듯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초석(礎石)이 일곱 모가 났으며 그 기둥이 소나무인지라 마음에 와 닿는 깨달은 바 있어 곧 그 기둥 밑을 더듬어 잘라진 칼 조각 하나를 찾아냈다.

유리가 이렇게 유물을 찾아내어 어머니 예씨부인과 더불어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를 함께 졸본(卒本)에 이르러 주몽을 찾아가니 주몽이 부러진 칼을 맞추어 확인하고 기뻐 그들을 맞아 유리를 태자로 세운다.【十九年夏四月 王子類利自夫餘 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삼국사기』「고구려본기」시조 동명성왕 편에 “19년(기원전19년) 4월에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더불어 도망하여 왔으므로 왕(주몽)이 기뻐하여 유리를 태자로 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자 고구려 건국의 일등공신들인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를 따라서 고구려를 떠난다.『삼국사기』「백제본기」는 비류와 온조가 “태자인 유리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북만주에서 한반도로의 기나긴 고난의 길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류와 온조, 또 소서노로서는 유리의 태자 책봉이거나 예씨부인의 비 책봉을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권력의 자리를 놓고 고구려 지배층은 유리세력과 비류, 온조 세력으로 나뉘어 져 크고 작은 충돌들을 했을 것이다. 결국 최고 권력자였던 주몽이 그의 고구려 건국의 발판 이였던 소서노 세력을 배반하고 유리편의 손을 들어 줌으로서 그들은 그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주몽의 죽음도 권력투쟁의 뒤 끝은 아닌지 예사롭지 않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가75세, 백제의 시조 온조가 65세의 수명을 누렸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눈여겨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급사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여튼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이끌고 고구려의 근처가 아닌 아예 머나먼 한반도의 중부까지 내려오면서 권력과 애정에 대한 배반의 슬픔과 증오로 가득 찬 원한의 발길을 걸었을 것이다. 상대 나라의 왕을 서로 죽이고 죽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원한은 어쩌면 이때부터 싹텄는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품은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한다고 했다.

많은 회한을 품고 고구려를 떠난 그들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서울이 있는 한강유역에 도착한다. 그들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서 가히 살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는 해변에 살고자 하였다. 10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헤아려 보면 이 강남의 땅은 북쪽에 한수를 끼고 동쪽은 높은 산악을 의지하고, 남쪽은 옥택을 바라보며 서변에는 큰 바다가 가로막혀 있어서 천험(天險)의 지리를 형성하고 있으니 얻기 어려운 곳이라 여기에 도성(都城)을 세움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 땅으로 가서 살고,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세우고 10신하의 도움을 받아서 나라를 세웠다. 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3년 이였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 비류는 미추홀 땅이 습하고 또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위례성에 와서 보니 도읍이 탄탄히 세워졌고 백성들은 태평하고 평안하였다. 비류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 되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으로 그를 따랐던 백성들이 미추홀을 떠나 위례성으로 모여 들었다. 이렇게 비류세력이 합세하자 위례성은 더욱 번창하였고 온조는 이를 기쁘게 생각하여 국호(國號)를 백제(百濟)라 하니 이이가 곧 백제의 건국시조(建國始祖)이다.

이 사람들의 계보는 고구려와 더불어 같은 부여 출신인 까닭에 성을 부여씨라 하였으나 사실 그들은 서로의 정통성을 놓고, 또는 부여의 맥을 잇기 위해서 치열하게 다퉜다. 고구려의 주몽이 동명성왕을 지칭한 것이나 백제의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자마자 동명성왕 사당을 건립하고 그 곳에 참배한 것도 모두가 그런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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