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임종선씨
임 종 선 씨
정천면 갈용리 교동(校洞)마을 출신
동양한약방 대표/동양상회 대표
제기동칠우회 대표
재경정천면향우회 자문위원

음력 3월은 참으로 그 하루가 길고도 지루하다. 임종선씨가 군에서 제대하고 향리에서 2년여간 인삼농사로 세월을 낚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계절적으로는 아마도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긔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그

런 계절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춘궁기(春窮期)거나 장리(長利)벼, 또는 입도선매(立稻先賣) 같은 슬픈 언어들이 판을 치고, 농민이촌(農民離村) 현상이 극성이던 그런 시절 이였다고 임종선씨는 기억하고 있다. 오동나무 꽃이 피면 노고지리가 보금자리를 틀고 별빛에도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게으름이 앞장서는 그런 계절 이였다.

마을에 조그마한 한약방이 있었다. 그 약방 집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를 임종선씨가 보기에 그렇게 존경스러웠다. 한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안방에 떡하니 걸어 놓고 그 할아버지는 항상 새 모시옷에 깨끗이 정장하여 입고, 두 팔은 뒷짐 지워 흰 고무신에 행여, 땅이 꺼질 새라 조심조심 걸어가는 그 모습은 가히 선비의 그것 이였고 그 할아버지를 만날 때 마다 그는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면서 부러워하였다.

나도 한약사(아니면 한의원)가 되어서 고향에 돌아와 한약방(또는 한의원)을 차리고 저 한약방 주인같이 살아야지, 그렇게 임종선씨의 꿈은 그 쪽으로 무르익어 갔다. 그리고 그는 그 것을 이루어 냈고, 제기동의 약령시작에 그 꿈속에도 간직했었던 그 한약방을 이루었는데 그는 아직 그 고향에를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임종선씨는 지금은 별세하고 안 계시는 아버지 임태규씨와 어머니 정규순(36년생)여사와의 사이에서 3남4녀 중 셋째로 태어나서 정천초등학교와 정천중학교, 그리고 전주의 전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에 82년 입대하여 85년 제대한다.

그의 고향 교동마을은 1914년2월까지는 용담군 일남면 농산리 지역 이였다가 3월부터는 진안군 정천면 갈룡리의 한 마을이 되었다. 처음에는 마을 이름이 없어 신기 위, 농산으로 불렀는데 동민회의에서 신생계를 조직하고 1941년에는 진흥촌으로 지정되고 마을에 학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 교동(校洞)이다. 마을 동북쪽 쪽바우들의 산기슭에는 옛날 장평리 또는 양악리라 부르던 옛 마을 터가 있었다.

이 마을에 들어 온 엿장수가 길을 잃고 헤맸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큰 마을 이였다고 한다.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노루목 재를 넘어 농산마을의 넓은 들에 농막을 치고 농사를 지었으나 도둑이 극성을 부리며 산 위에서 큰 돌을 굴러 내리고 하여 폐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임종선씨는 전설을 읽듯이 들려준다. 그나마 지금은 수몰되어 돌아 갈 수 없는 고향이 되었다고 그는 한숨을 쉰다.

이렇게 2년을 인삼농사로 보낸 임종선씨, 생각한 바 있어 고향을 등진다. 당시의 현실을 짚어 볼 때 그것은 그에게 큰 용기였고 모험이었다. 어느 날, 인간 앞에 닥친 용기의 시험에서 우리가 망설이지 않고 나설 수 있다는 것은 평소에 그가 갖고 있었던 자화상(自畵像)의 정체성에서 긍정적 세월의 소유권을 그가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냐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가끔씩 영화에서나 또는 성서에서 읽어 왔었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생각해 본다. 방패 든 호위무사를 앞세우고 칼과 군복과 투구로 무장한 골리앗에게 막대기와 매끄러운 돌 다섯 개와 물매 하나로 무장한 다윗의 싸움에서 상상을 초월한 정신적 정체성을 간직한 다윗소년의 승리를 우리는 실감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작정 상경한 임종선씨는 이산 의료기에서 지낸 2년을 빼고는 한결같이 한약방(한의원) 개설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그 테두리에서 평생을 살아왔노라 그렇게 회고한다.

서른세살 늦은 나이에 최성숙(47세·전남화순)씨와 지인으로부터 소개 받아 첫눈에 반해버려 그녀와 결혼하고 세 아이 낳아 잘 살면서 하늘의 직분(職分)처럼 고생을 감수(甘受)한 아내의 그 버팀이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아내의 인고(忍苦)에 관하여 경외감(敬畏感)을 갖는다고 했다.

삭을 세 지하 방 한간에서 시작하여 10년 셋방살이에 10번 이사의 그 세월을 그는 오래 기억하면서 아내를 사랑 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질병에 고초 받던 민초들을 불쌍히 여겨 동의보감 등 어려움을 딛고 많은 의서(醫書)들을 남긴 허준을 그는 존경한다. 서자 출신의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의성(醫聖)의 반열(班列)에 까지 오른 허준을 그는 많이 존경한다. 의술(醫術)의 수준을 넘어 유교, 도교, 불교의 자연관을 수용해서 의학철학으로 승화시킨 허준과 그의 동의보감을 우리의 필독서로서 그는 모든 이들에게 감히 권한다고 했다

그는 예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인내로 끈기로 또는 일편단심으로 늦가을 진 서리가 내릴 때까지 오래도록 피어있는 무궁화 꽃을 아껴 좋아 한다.

우리의 고향사람 임종선씨.
지금 비록 수몰되어 없어졌지만, 그는 그의 고향을 사랑한다. 어릴 적 넘나들던 노루목 기억하며 옥녀봉을 사랑한다. 황새목 재를 생각하며 국사봉을 추억한다. 가마소(沼)에 멱 감던 또래들의 웃음소리를 들어본다. 길 옆 200년생 느티나무 밑 쉼터에선 장기 두며 떠드는 소리가 그립다.
명의숙(明義塾)의 그 후예(後裔)들 지금 다 어디서 무엇 하는지.  

임종선씨 연락처: 011―9021―7817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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