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특집 인터뷰 … 강봉열 할아버지의 '지옥 같던 3년'

▲ 강봉열 할아버지
어제까지 손잡고 놀던 친구가 다음날 비명을 달리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그날.
어깨가 빠지면서까지 부상 입은 전우들을 짊어지며 살리려 발악했던 그날.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전우들의 비명소리, 고막을 찢을 것 같던 총성…. 쉽게 상상하려고 하지 말게나.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니. 그날의 죽음을 말해달라고 하지 말게나. 감히 내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일이라네. 나는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하겠어, 어쩌겠어…."

강봉열 할아버지(국가유공자 진안군지회 사무국장, 육군상사출신·79)가 한국전쟁을 치른 지 벌써 55년, 엄청난 폭격이 굉음을 내며 산을 뭉개버렸던 기억을 더듬는다. 금세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감도는 강봉열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지난 동족상잔의 이야기를 묻는 이들이 이유 없이 미운가 보다.
 
◆아직도 괴롭히는 전장 소음

강 할아버지는 이미 80세를 바라보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세월의 중심에 섰지만, 21살 겁 없던, 용감하기만 했던 강 상사 시절을 또렷이 기억한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것이 군인이야. 우리는 그 때 한 치의 땅도 뺏겨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지. 때는 이미 살고, 죽고의 의미가 아니야. 내 나라를, 내 땅을 지키겠다는 충(忠) 만이 남지. 그럼 목숨을 내 놓고서라도 땅을 뺏기지 않는 것이 군인들의 법이야."

'땅따먹기 전쟁'이다. 내 땅, 네 땅이 아닌 '우리 땅'이었건만, 한 동족이 서로 다른 이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땅따먹기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중에는 먹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아 몇날 며칠을 굶으며 적들과 맞서야 했고, 물 한 모금 마시기가 힘들어 소변을 받아먹으며 전쟁을 이어갔다.

"지금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힘들지. 우리 세대는 잘 알지. 우리가 그 때 왜 살아야 했는지를, 무엇을 지켜야 했는지를 뚜렷하게 알고 있지. 적어도 그땐 목표라는 게 있었거든."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공훈을 세워 강 할아버지가 받은 무공훈장만 4개에 이른다. 이는 전북 전체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내 전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영예들이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현리포 탈출 작전에서도 전우들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어."

강 할아버지는 현리포에서 일주일간 포로로 잡혔던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상념에 잠겼다.

"그때 당시 포로가 되면 적들의 노예나 다름없었어. 적군의 수류탄, 무기 등을 옮겨주는 등 포로들을 일꾼으로 부렸지. 우리 소대원들이 적들의 급습에 30명 전원이 포로가 된 적이 있었어. 하지만 우리 30명은 일주일 만에 전원 탈출에 성공했지. 그때 탈출하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있었을까?"

왠지 모를 씁쓸함과 고독함이 묻어있는 목소리다.
 
◆먼저 보낸 전우들 넋
그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에서 21살 강봉열 상사는 최후의 발악을 하며 부산함락을 막아냈다.
비록 55년이 지나 국민들에게 잊혀져가는 한국전쟁 희생자들이지만 강봉열 어르신은 절대 그때 흘린 피를 잊을 수 없다.

"그들이 흘린 피로 일궈낸 땅 아닌가. 지휘관으로서 한 명이라도 지켜주고 싶었는데…. 그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내 전우들, 비석이라도 쓰다듬어 주면 마음이 그나마 좀 나아."

주기적으로 호국원을 찾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비석을 쓰다듬는다는 강봉열 할아버지.
이내 먼 곳을 응시하던 어르신은 "지금 말해 뭐하겠나, 이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라며 입술을 지그시 다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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