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전봉호씨
전봉호 씨
동향면성산리장전부락 출신
(주)세창안전 공장장
재경동향초등제39회동창회장
재경동향면향우회 운영위원

-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굽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양지 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오늘처럼 촉촉이 비가 내리면/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양지 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나와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똑 따지 않으시렵니까/

우리 전북의 목가시인 신석정이 그랬듯이 우리의 고향사람 전봉호씨가 그랬다. 마을 동구 밖까지 마중 하시면서 어머니는 그랬었다. "어서 가거라. 옛 부터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고 했다더라. 지지리도 복이 없어 이런 집에 태어나서…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으니…" 이른 새벽 눈물로 흠뻑 젖은 종이 돈 몇 푼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돌아서는 어머니를 전봉호씨는 가슴에 잊을 수 없는 앙금으로 새기고 고향을 떠난 후 객지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성공해서 돌아가리라, 반드시 돈 벌어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리라, 그 결심들도 헛것이 된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한 그 불효를 뼈저리게 가슴에 새기는 그 즈음 그 것은 순전히 생활의 탓이라고 그의 가슴 속에 변명하면서 더 잘 살겠다고 아등바등 그렇게 살아왔다. 양친 부모님을 모시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그 먼 나라에 가서 살고 싶었던 그 약속도, 비둘기를 키우자던,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오자던, 빨간 능금을 또옥똑 함께 따자던 그 소박한 약속도 지켜지지 못한 채 그의 아버지조차 그렇게 운명 하셨을 적에 그는 현실과 꿈의 그 틈새 속에서 풍수지탄(風樹之嘆)의 그 의미를 뼈저리게 느낀다고 했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으면 정말 잘 할 수 있었는데, 일곱 남매를 거두느라 바람 잘 날 없었던 그 세월 속에 잠겨있는 그 은혜를 갚으려 했었는데, 지금 다시 진달래꽃이 피는 계절이 또 가는데 효도하고 싶은 그의 부모님들은 그의 곁에 없음을 그는 한탄한단다. 4월이 되면 그는 가끔씩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아 부모님이 누워 계신 묘역을 둘러본다고 했다.

아버지가 좋아 하셨던 그래서 그도 좋아했었던 빨간 진달래꽃 한 아름을 부모님 묘역에 바쳐놓고 진달래꽃에 숨어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위나라에 망하여 도망한 촉나라의 임금 망제의 이야기도, 와신상담(臥薪嘗膽)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망제의 원혼이 된 두견새가 귀촉, 귀촉(고향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슬피 우는 그 이야기도 그는 항상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우리의 고향사람 전봉호씨.
그는 고향 장전에서 아버지 전기택(사망)씨와 어머니 동순덕(사망)여사의 4남3녀 중 넷째로 1958년 12월에 천안전씨 대제학공파 57세손으로 태어났다.

전 후, 1950년대의 이 나라 농촌의 현실이 그랬듯이 그의 집 사정역시 그랬다. 농토는 적고 식구는 많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은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었던 그 속에서 그는 호롱불 밑에서 통학거리 왕복 10km가 넘나드는 동향초등하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서 농사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고향 장전마을은 대덕산(875m)에서 뻗어 내려와 매봉에 닿은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구량천이 흐르고 마을 앞으로는 험산 천반산이 자리하고 있는 천연의 요새지다.

전봉호씨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난 것은 그 이년 후 여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35년간, 그 인고(忍苦)의 세월이 그에게는 꿈만 같다고 술회한다. 서울에 던져지듯 도착하여 중화식당에서 '짜장면시키신분'을 시작으로 하고, 시립청소년기술학원에서 봉재와 재단을 익히고 까운집, 봉제공장, 양복점을 전전하며, 그리고 꿈을 안고 시작했었던 「세창실업」의 흔들리는 바람 앞에서 잠 못 이루던 그 세월도 있었다.

이제 시대의 현실 앞에 순응하는 자세를, 그리고 인생과 좌절과 청운과 꿈이라는 그런 것들이 사치스런 용어들로 그에게 다가와도 항상 그것들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숨겨진 한(恨)들이 아무리 그의 삶에 응어리로 남겨져 있다 하드래도 그는 이제 그것들을 잊을 것이라 했다. 평화롭고 조용한 그 먼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풍요롭고 소박한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평범한 자신의 인생행로에 동참하고 월세 방의 고통 속에서도 잘 참고 견디어 준 그의 아내 황석자(47.강원인제)여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고도 했다. 이제 그 세월의 보상을 위하여 더욱 아름다운 추억으로 살아가겠노라고 했다. 전화번호: 010-2003-0583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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