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박점곤 씨
박점곤 씨
백운면 백암리 중백암마을 출신
시내버스『흥안운수』운전기사
서울시버스노동조합 흥안운수 지부장
한국노총중앙위원/대의원
전국자동차노조연맹중앙위원/대의원

그는 가끔씩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많은 세월을 덧없는 인생으로 살아 왔노라고 그러한 자괴지심(自愧之心)으로 자신의 걸어 온 발자국을 뒤 돌아 보고, 또 헤어보고, 후회 하다가는 한숨지으며, 그리고 주마등(走馬燈)으로 달려오는 그림자들을 다시 돌아 볼 때가 참 많았었다고 회고하는 그의 눈가에 가느다란 이슬이 보인다.

이렇게 회한으로 살아 온 그의 인생에 대한 것들이 그의 가슴에 뭉클한 풍수지탄(風樹之嘆)으로 밀려 올 때면 임종조차 지켜드리지 못한 아버지, 그리고 홀로 외롭게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어머니에 대한 불효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고 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그 일상(日常)의 세월 54년을 자유인으로 또는 팔방미인으로 그렇게 살아왔단다. 생각 해 보니 이제 나이 들어 철이 드는갑다고 그렇게 쓸쓸하게 그는 웃음을 감춘다. 그래도 고향을 생각하면 항상 추억과 향수는 아름다움으로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더란다.

우리의 고향사람 박점곤씨가 그랬다.
1954년 6월 백암리 중백암 마을에서 지금은 작고하신 박찬화씨를 엄격한 아버지로, 이남례(78)여사를 자혜로운 어머니로 하여 삼남삼녀 중 장남으로 그는 태어난다. 본관은 밀양(密陽.행상공파)이다. 이 나라의 가난한 농가에 태어난 장남은 태어나면서부터 상당한 운명적 부담으로 다가 온다고 했다. 그가 백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기로 결심을 굳힌 이후,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서 마을의 서당에 다니기로 하였지만 학벌 만능의 이 나라 이세기의 현실 앞에서 그는 두고두고 학벌 콤플렉스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서당은 그가 생각했었던 것 보다는 더 많이 지식의 전당 이였고 더 많은 가슴에 와 닿는 지식들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먼저 하늘 천(天)과 따 지(地)의 천자문(千字文)으로 글방에 들어 간 그는 사자소학(四字小學)에서는 "아버지는 내 몸을 낳게 하시고(父生我身),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도다(母鞠吾身)."하는 천륜적 진리를 배운다. 그리고 다시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 "위에는 하늘이 있어 그 하늘에는 해, 달, 별이 매어있고, 밑에는 땅이 있으니 땅, 바다, 산이 거기 실려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사람과 만물이 있어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장유(長幼)와 부부(夫婦), 그리고 붕우(朋友)의 인간의 다섯 가지 큰 윤리를, 또는 우주의 형성에 관한 기본적인 이치들이 있느니라."그렇게 배워 갔다.

그러나 그의 운명론적(運命論的)이고 회의적(懷疑的)인 주술(呪術)의 유희(遊戱)는 그의 현실적인 환경이 그를 고향마을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그냥 두지 않았다고 그는 그렇게 회고하고 있다. 세 번째 책거리를 마치고, 맞은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그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있고, 부(富)하고 귀(貴)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느니라(死生有命, 富貴在天).』

열일곱 살의 박점곤씨는 모심기가 한창이던 그 때, 순전이 오월 하늘에 조잘대는 종달새 울음소리가 서러워서 그냥 그렇게 고향마을을 떠났단다. 아버지의 진노(震怒)와 어머니의 한숨이 그렇게 시작이 되었고, 나이가 들어가며 철들어가는 그의 풍수지탄(風樹之嘆)의 불효막심도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집 나가면 고생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물며 빈손으로 뛰쳐나간 그의 그 고생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전주의 흥일건재사에서 인부생활 삼년, 그리고 뜻한바 있어 시외버스의 차장으로 운전수(運轉手)의 길에 입문(入門)한다. 그것은 그의 운명 이였다. 거기서 삼년, 그는 그의 역마직성(驛馬直星)을 따라서 그의 운명인 서울의 길목에 나그네 되어 서 있었다.

대한통운에서 이년을 보낸다. 그리고 중장비운전면허에 열중하여 그 면허증을 얻어낸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건설현장에서 만난 그이들과 어울려 연립주택 분양현장의 유혹에 빠져든다. 참 세상살이가 쉬워 보였다. 그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기지개를 펴는 듯 우쭐!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많은 세월이 그렇게 지나간다. 고향집과 소식이 끊긴지는 상당히 오래다.

 주민등록은 직권말소 상태였다. 그렇게 노동판을 휘젓는 동안 주색잡기에 빠져든다. 술독에 빠져 살았다는 표현이 옳았었던 그 시절, 객지에서 방황하던 인간의 심신(心身)이 온전했겠는가. 해이(解弛)된 정신의 몽환상태(夢幻狀態)에서 꿈자리의 꿈속 같은 환시적(幻視的) 허무세계(虛無世界)를 그는 보았다. 그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급성맹장으로 입원한 병상의 자신을 본다. 거기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고 노한 아버지의 한숨을 들었다. 그는 외롭고 주눅 들린 참으로 쓸쓸한 귀향(歸鄕)을 그렇게 했더란다.

고향마을 중장비건설화사의 오년은 어쨌든 그에게는 기회를 만들어 준 좋은 세월 이였다. 그는 거기서 아내 문선자(용담)씨를 만나고 결혼한다. 그가 고향에서 만들어 낸 그 역경들은 후일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하겠지만 그가 다시 남부여대(男負女戴) 상경하여 상계동 고물상에서의 맞벌이 사년, 안양 무늬목가계의 영업부장 일 년의 그 세월을 거쳐 1991년10월 서울시내버스「흥인운수」 운전기사로 취업하고 19년, 좌절과 영욕의 그 세월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자랑스럽게 걸어온 것은 그는 물론 학벌개념(學閥槪念)에서 취약성을 안고, 주눅 들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인간승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된다.

우리의 고향사람 박점곤씨.
그는 지금 어려운 우리사회의 노동현장에서 약한 종업원들을 강한 사용자의 횡포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노동조합의 본질이 아무리 인위적 독점이라고 하드래도 그 방법만을 고집하는 대신, 법과 사회안전망으로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방안을 그는 제시한다. 그것은 그가 330명의 조합원을 안고 있는 서울버스노동조합 흥안운수 지부장으로서의 카테고리(category)가 되어서 회사와 노동자간의 원만한 조정활동을 약속하고 그 직(職)에 선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락처: 011-266-4876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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