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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한국독립군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국군
icon 김민수
icon 2013-10-01 08:53:06  |  icon 조회: 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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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한국독립군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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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大韓民國) 국군(國軍)의 기원은 황궁(皇宮)의 시위대(侍衛隊),한성의 친위대(親衛隊), 지방의 진위대(鎭衛隊)로 구성된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이다.시위대(侍衛隊)는 1895년 칙령(勅令) 120호의 반포에 따라 편성된 군대로 군부대신의 감독 아래 황궁(皇宮)의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그 편제는 1개 연대(2개 대대) ·1개 대대(2개 중대) ·1개 중대(3개 소대)로 하였으며 연대에는 연대장(副領)을 비롯 대대장(參領) 2명, 부관(副官:副尉) 2명, 향관(餉官:正尉) 2명, 중대장(正尉) 4명, 소대장(副尉:參尉) 14명이 있었다. 양번(兩番)으로 나누어 매 3일마다 교대하여 궁내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군악대도 부설하였으나 창설 3개월 후인 8월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이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중앙군(中央軍)을 러시아식으로 개편하면서 1897년(광무 1) 3월 시위대를 다시 설치하였다. 시위대는 총원 1,070명으로 200명을 1개 중대, 5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제하였는데, 대대본부에는 대대장 1명, 부관(부위) 1명, 향관(軍司) 1명, 정교(正校) 1명, 부교(副校) 1명을 두었으며, 중대에는 중대장 1명, 소대장 4명, 부교 ·참교 14명, 병졸 180명을 두었는데, 10월 1개 대대를 추가 편성하여 1대대와 2대대라 하였다.1895년 칙령(勅令) 170호로 육군편제강령(陸軍編制綱領)을 발표하여 중앙의 육군을 친위대(親衛隊)로, 지방군을 진위대(鎭衛隊)로 편성하게 하였다. 친위대는 한성을 방위하는 임무를 담당하여 대대(大隊)로 편성하였다가 1896년 4월 22일 칙령 21호로 연대로 편성하여 연대본부와 휘하에 3개 대대를 두었다. 또한 연대본부에는 공병중대와 치중중대(輜重中隊)를 직할로 하고, 연대장,부관,무기주관(武器主管),연대기관(旗管),본부부하사(本部附下士),정교(正校),부교(副校),참교(參校) 1명씩을 두었다. 진위대(鎭衛隊)는 1895년 칙령(勅令) 172호에 의해 평양과 전주에 각각 1개 대대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900년 9월 원수부의 명으로 전국을 6개 연대로 재편하고 이어 제주진위대를 증설함으로써 전국적 편성을 완성하였다. 각 연대에는 연대본부와 3개 대대를 두었는데, 6연대에 2개 대대를, 4연대와 제주진위대에는 1개 대대만을 두었다. 그리고 1개 대대는 2개 중대로 편제되었다. 또 각 연대본부(1, 2, 3대대본부)는 1연대는 강화(강화, 인천, 황주), 2연대는 수원(수원, 청주, 전주), 3연대는 대구(대구, 진주, 경주), 4연대는 평양, 5연대는 북청(덕원, 북청, 경성), 6연대는 의주(의주, 강계)에 설치되었다.







1907년 8월 일본군국주의 통감부가 정미늑약을 불법 늑결하고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을 강제 해산하자 9월 강원도 원주에서 정미독립운동군(丁未獨立運動軍)을 모아 활동하던 이은찬(李殷瓚) ·이구재(李九載) 등이 경북 문경의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인영(李麟榮)은 이은찬의 정미독립운동군부대를 원주를 거점으로 하는 관동창의부대로 개칭하여 독립운동군을 모집하는 한편 각도의 정미독립운동군부대에 격문을 보내 11월에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양주에 모인 각도의 정미독립운동군부대는 이인영을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전국연합부대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편성하였다.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편성은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許蔿), 관동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 호서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 교남(嶠南)의병대장 박정빈(朴正斌), 경기 ·황해 ·진동 의병대장 권중희(權重熙), 관서의병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의병대장 정봉준(鄭鳳俊), 호남의병대장 문태수(文泰洙)였다.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총병력은 1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해산된 군인 3,0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8년 1월 이인영(李麟榮)은 먼저 각국 공사관에 정미독립운동군부대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보내는 한편 군사장 허위(許蔿)가 이끄는 3백 명의 선발대가 흥인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후속 부대의 지원이 없어 퇴각하였고 부친의 부음(訃音)을 받은 총대장 이인영은 지휘권을 허위에게 맡기고 귀향해버렸다. 이후 의병들이 여러차례 이인영을 찾아가 복귀를 권유하였으나 아버지 3년상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다.한성(漢城) 진공進攻)에 실패하고 총대장이 없는 연합군은 다시 전국으로 흩어졌다.







국군(國軍)은 대한시대(大韓時代:1897- ) 대한광복운동기(大韓光復運動期)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이흥수(李興秀)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圭植),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의 대한국 독립군(大韓國 獨立軍)과 1939년 3월 1일에 결성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당군(黨軍),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요인과 중국의 각계 인사, 외교사절 등이 모인 가운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창설되었다. 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는 독자적이고 자주권을 가진 광복군을 창설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한국광복군의 성격과 위상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과 구국의 의지가 강력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주권과 통수권을 행사하는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위상을 갖는 군대로 마침내 탄생하게 되었다.한국광복군은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대한국 독립군(大韓國 獨立軍)의 대한국 독립운동정신을 계승하고 대한국 독립군(大韓國 獨立軍)의 전투역량을 흡수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어 대한시대(大韓時代) 대한광복운동기(大韓光復運動期)에 우리 국군의 군맥이 면면히 이어질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연합국과의 공동 군사작전에 참여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는 등 전과를 올렸다. 한국 광복군(韓國光復軍)은 1942년부터 미군과의 OSS합동훈련을 기획했고 미군과의 한미 공동으로 국내진입작전을 진행하였으며 이 작전이 실행단계에 접어들 무렵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에 의한 1945년 8월 15일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의 갑작스런 무조건적 항복으로 한미공동 국내진입작전은 좌절되었지만 한국광복군은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광복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고 노력하였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귀국 후 1945년 10월 편성된 미군정(美軍政)의 통위부(統衛部) 소속으로 국방경비대를 결성하여 국군(國軍)의 모태가 되었다. 해병대(1945년 8월 23일)·국군준비대·육해공군 동지회·학병동맹·해방병단(海防兵團)(1945년 11월 11일) 등이 결성되었으나 1945년 11월 13일 국군 창설의 최초의 시도로 미 군정 법령 28호로 아놀드 군정장관 지휘하에 국방사령부가 설치되자 여러 군사단체들이 하나로 흡수되면서 대한민국의 국방을 위한 조직·편성·훈련이 착수되었다. 1945년 12월 5일에 미군정청(美軍政廳)이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여 11명의 요원을 배출하면서 국군의 기간장교가 육성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1월 15일에는 불과 1개 대대의 병력으로 경비대(초대 대장 마셜 미 육군 중령)가 창설되었으며, 1946년 3월 29일 공포된 미 군정법령 64호에 따라 국방사령부가 국방부로,1946년 6월 15일에는 군정법령 86호에 따라 국방부는 다시 통위부(統衛部:초대 통위부 부장 류동열, 초대 총사령관 송호성)로 개칭되었다. 1946년 1월 15일자로 발족했던 경비대는 국방경비대로, 그리고 1945년 11월 11일 발족했던 해방병단은 해안경비대로 각각 발전하였다. 12월 1일에는 현행 계급제도가 채택되었으며 1948년 4월 1일에는 국방경비대 안에 항공부대가 창설되었다.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공포됨에 따라 초대 국방장관에 이범석 장군이 임명되었고 8월 29일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는 국군(國軍)으로 편입되어 9월 5일 마침내 육군(초대 참모총장 이응준) 및 해군(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이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이후 육군에서 공군과 해군이 나뉘고 해군에서 해병대가 창설되게 되었다. 1948년 4월 1일 국방경비대 안에 창설되었던 항공부대는 9월 13일 육군 항공사령부로 승격하고 1949년 4월 15일 진해에서 해병대(초대 사령관 신현준)가 창설되었다.10월 1일 육군으로부터 분리되어 공군(초대 참모총장 김정렬)으로 정식 발족함으로써 국군(國軍)은 3군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국군의 통수권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있으며, 국방정책에 관하여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심의한다. 대통령의 명을 받아 국방장관이 군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고 각군 참모총장을 지휘감독하며 합동참모본부와 국무회의가 국방장관을 보좌한다.
2013-10-01 08: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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