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1965~)한동안 넝쿨만 밀어 올리던 능소화나무좁은 골목길 담장에 기대어황적의 커다란 귀를 활짝 열어젖힌다한 시절 다해 이곳까지 오는 길이몽유의 한낮을 돌아 나오는 것 같았을까지친 기색도 없이 줄기차게태양의 문장들이 돋아난다서로를 의지하는 것들은보지 않아도 뒷모습이 눈에 익는 법오랫동안 등을 맞대고 속내를 주고받던 담장이울컥, 먼저 뜨거워진다(&he
송 찬 호 나는 이제 좁쌀보다도 작은 백도라지씨를 더는 미운 마음으로 가려내지 말자고 다짐했다그래도 사방이 온통 보랏빛인 청도라지 꿈을 꾸다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나는 길을 잘못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반달을 툭 분질러 깨문 것같이, 길을 잘못 걸어왔는지도 모른다산길을 걸을 때 희기도 하고 보랏빛이기도 한 얼룩이 옷에 묻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산첩첩 노루산장에서
작자 미상(미국 뉴욕의 신체장애자 회관에 적힌 시)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
강 신 재허공에 매달려유리창을 닦는 저 남자밧줄 하나에 목숨을 걸고닦은 먼지는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인다허공에 매달린 순간어깨에 얹힌 무게는 잊기로 한다자신의 몸무게도 잊어야유리창을 반짝이게 할 수 있을 테니까아내의 핏기 없는 얼굴과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있어하늘 가까이허공에 흔들리는 남자 인생은 시계추같이 제자리를 왔다갔다 한다. 딱한 일 같지만 제일 안전한
박지웅(1969~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배짱 한번 두둑하다아예 울으믕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도무지 없다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칠년 만에 받은 목숨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김시철조곰은 모자란다 싶게 먹는답니다 그래야 배탈도 안 나고 속 편하니까 과식(過食)도 탐욕 아니겠습니까 절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 절제를 잘 하는 사람은 먼 길을 가는 동안 편안하다. 시인은 잠시 먹는 일에 눈을 돌렸는데 과식에 대해 '탐욕'이라고 꼬집는다. 위험하다, 절제는 내가 지켜 철저히 이행해야 할 인생 안전브레이크다.
김이하(1959~)나 아직도새장에 갇혔네그대를 사랑하여그대를 사랑하여그 안에 사네오래, 아주 오래아프고 쓸쓸하였네새벽이 오면,그 오랜 새벽이 오면사랑을 버리려네자유를 갈망하여새장을 버리려네 스스로 참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고통스러운 일 일 것 같으나 남을 위한다면 아무렇지도 않다니 위대한 정신이다. '나 아직도 새장에 갇혔네' 왜 새장으로부터 벗어
황송문우리 곱게곱게 익기로 해요. 여름날의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내고 금싸라기 겨울볕에 단맛이 스미는 그런 성숙의 연륜대로 익기로 해요. 우리 죽은 듯이 죽어 살아요. 메주가 썩어서 장맛이 들고 떫은 감도 서리 맞은 뒤에 맛 들 듯이 우리 고난 받은 뒤에 단맛을 익혀요. 정겹고 꽃답게 인생을 익혀요. 까치밥은 나뭇가지의 높은 곳에 예쁜 것으로 남겨 두어야 한
전신자초여름 저물녘 숲에 들면 심신이 이완되며 한가해진다 아스라한 곳에서 스산한 바람이 일고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는 곳에 순한 맥박이 뛰고 서어나무도 박동수를 줄여 조용히 나부낀다 숲엔 이런 것들이 늙은 햇빛을 적신다 숲 속의 모든 숨결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 내가 숲을 좋아하는 이유다 사람은 아무리 찾아도 흔적 없고 숲의 영역만 방만하게 펼쳐져 있는 어질어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오래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그는 "아리랑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무슨 뜻?…. 잠시 머뭇거리다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찾는 답이 아니라서 수화기를 내려
막스헤르만(17세기)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 어느날 나는 그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늦어지자 친구는 여종업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 무시를 당한 여종업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난 지금 그 친구의 무덤 앞에 서 있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 것이 불과 한
이시영(1949 ~ )이 고요 속에 어디서 붕어 뛰는 소리 붕어의 아가미가 카 하고 먹빛을 토하는 소리 넓고 넓은 호숫가에서 먼동 트는 소리 어제 저녁 10시까지 저수지에 앉아 붕어낚시를 했다. 적막과 고요를 물에 발라 들어올리는 캐미컬라이트가 밝히는 찌의 움직임은 낚시의 극치였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왔는지 새벽은 경이롭다. 태어나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 경
김완철벗어 놓은 아내의 신발 가즈러니 앉아있다 등에 업고 머리에 인 자식들 걱정 질질 끌고 온 무게로 바닥이 닳고 골다공증을 앓아 자세가 틀어지고 헤진 신발 매일 들랑거리는 문 앞에서 나의 시선을 외면하듯 코를 돌리고 있다 산 넘고 보릿고개도 넘어 온 땀과 피가 밴 신발 걸어 온 길 내려놓은 채 맨발로 떠난 아내의 유품 "발을 위해서라면 얼굴을 화
이 안(1967~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당신 너머에서 와요 내가 사랑하는 국화가 국화 너머에서 오듯이 꽃이 아니라 나비를 초대하기 위해 내가 심은 꽃나무가 꽃나무 너머에서 오듯이 "나의 사랑은 당신 앞에서만 흔들려요" 나의 진심어린 고백일지 모르겠다. 사랑의 고백은 용기 결단이 필요없다. 그저 눈이 햇살에 닿으면 몸이 녹아 물로 변하듯
송 희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있죠 엄마의 하루 코스예요 마늘더미 쌓아놓고 까는 거 멸치 서너 상자 해치우는 거 분리수거 안 한 사람 있나 실피는 거 다 손질한 거 사먹는 나는 헛소리를 해요 "일 좀 놓으세요 다음에 소로 태어날 거유?" 저 앞에 가는 저분이 엄마가 아닌 듯 또 엄마겠죠 분가루 대신 땀 칠을 하고 팔랑개비처럼 시장 골목을 돌
금지옥엽 옥이가 안에서 담벽을 만지며 걸어가다가 마당쇠가 밖에서 담벽을 만지며 걸어오다가 안과 밖에서 두 손바닥이 마주치더니 같은 쪽으로 걸어간다 두 손이 나란히 같은 쪽으로 가다가 같은 쪽으로 되돌아온다 허공에 뜬 달이 한밤 내 내려보다가 마침내 담을 지워버린다 해가 뜨면 달은 다시 제 자리에 담을 세우고 골목길이 앙살을 피우며 담을 따라 휘돌아가고 이
-이용헌(1959~) 빗방울이 툭, 정수리에 떨어진다 가던 길 멈추고 하늘 쳐다본다 누구인가 저 까마득한 공중에서 단 한 방울로 나를 명중시킨 이는 하기야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단 한 번의 눈빛으로 나의 심장을 관통해버린 그대도 있다 존재는 무겁고 때로는 진귀하다. 얼마나 많이 토해내고 또 집어삼킨 사물들로 쌓아놓은 결과물인가. 하늘에서 내린 천둥번개의
이해인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부지런한 새들 가끔은 편지 대신 이슬 묻힌 깃털 한 개 나의 창가에 두고 가는 새들 단순함, 투명함, 간결함으로 나의 삶을 떠받쳐 준 고마운 새들 새는 늘 준비를 하고 나는 늘 남아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새의 연약한 날개짓인데도 때론 힘이 되어 주고 있으니 고마운게다. 단순함, 투명함, 간결함이 얼마나 많은 영양가가 있겠는
심옥남터벅터벅 실업급여를 타러 가는 좁은 골목길 발 끝에 채여도 무심히 지나치는 게 불문율이다 비정규직의 봄은 갓길로 온다 민들레는 어느곳에서도 잘 살고 있다. 노랑, 흰색을 입은 꽃의 자태 다소곳하다. 이른봄 3월의 추위에도 무서워하지 않고 힘찬 몸짓으로 몸을 키웠다. 정신력, 의지력 강인하게 삶을 들어 올리면서 꽃을 피워낸 것이다. 접은 골목길에서도 민
자디아 에쿤다요내가 원하는 것은 함께 잠을 잘 사람 내 발을 따뜻하게 해주고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게 해줄 사람 내가 읽어 주는 시와 짧은 글들을 들어 줄 사람 내 숨결을 냄새 맡고, 내게 얘기해 줄 사람 내가 원하는 것은 함께 잠을 잘 사람 나를 두 팔로 껴안고 이불을 잡아당겨 줄 사람 등을 문질러 주고 얼굴에 입맞춰 줄 사람 잘 자라는 인사와 잘 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