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미의 문화산책
이용미 문화관광해설사

"1만 2천5백 원입니다." 맑은 표정과 목소리가 일치하는 수녀님이 건네는 3권의 책을 소중히 받아 안았다.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는 삶과 죽음의 병을 치료할 소중한 치료제를 허투루 받을 수는 없었다.
꼭 그러리라 생각했다. 아니 꼭 아니리라 믿었다. 절대 아닐 것이라 고개를 젓는 한편 운명이라면 할 수 없지. 그래도 요즘 세상 환갑도 못 돼 죽는 게 어디 있어, 너무 억울하잖아. 허지만 암이라고 다 죽나 뭐? 수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가 놓고는 사라졌다. 이런저런 사이트에서 검색하는 위암의 증상 중 절반은 절망으로 몰아넣고 절반은 희망으로 끌어올렸다.

맡은 일을 하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져 펄펄 날 듯하다가도 그 외의 시간이면 걷잡을 수 없이 달라붙는 위의 통증과 두통에 덧붙여오는 어지럼증까지…….날마다 아프고 날마다 괴로운 순간이 범벅되어 설움과 분노가 자꾸만 쌓여갔다.
예전 동네에 마음 착한 젊은 여자가 갑자기 죽자 안됐다는 말과 함께 집안 정리정돈이 도마에 올랐던 일이 떠올라 시간만 나면 옷장들을 여닫으며 소일했다.

처방된 약은 먹을 때뿐 차도는 없고 신경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지고 혈압은 뚝 떨어지자 더럭 겁이 났다. 그런 한참 후에야 받은 위내시경 결과를 의사는 싱겁게 말했다. 위에 이상은 없다, 처방해준 약은 심심하면 먹고 대신, 건너편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사서 다섯 번쯤 읽어라, 괜찮으면 12권 시리즈로 되어 있으니 더 사보던지 그건 본인의 판단에 맡긴다.

현직 신부님이 쓴 것으로 시리즈로 된 문고판 단행본이었다. 1권을 골랐다.
'상처와 용서'라는 제목이 눈을 끌었다.
용서는 상처받은 자가 하는 것이다, 는 말이 과연 맞는 것인가. 상처받은 마음으로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디 쉬운가. 말로는 뭘 못해, 살인자도 역적도 용서한다는 말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근데 대체 내 무슨 상처를 얼마나 받았고 용서할 일은 또 무엇인가. 지금 내 병이 꼭 상처를 받고 용서를 안 해서 일어난 것인가. 왜 하필 의사는 이런 책을 권했고 난 하필 이 책을 고른 것일까.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났다. 일주일을 여러 사람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어긋난 형평성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억울해서 못 견디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이 본인의 마음과 같으리라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 행동을 대부분은 방관했고 일부는 손가락질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그 사람은 내내 편치 않은 얼굴로 여러 사람을 애써 불편하게 하는 바람에 의견이 분분했다.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한다는 사람, 너그럽게 끌어안아 주자는 사람, 역시 그냥 내버려 두라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방법이든 작은 해결의 실마리라도 끌어내야 하는 내 입장이라 속은 속대로 타는데 일은 이리저리 부딪혀 자꾸 더 꼬여 갔다. 아예 내쳐버릴까? 갑자기 상처와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다. 상처받은 자가 용서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갈등이었다. 나는 나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주고받은 상처를 싸안고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것을, 상처의 아픔만 생각했지, 용서의 평온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억지를 부려봤다. 사과를 해보라고, 용서를 해줘 보라고 사정을 하고 강요를 하다 내가 다시 상처받는 짧은 악순환을 거치면서도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받는 상처보다 하는 용서가 어려워서, 아니 처방해준 치료법 다섯 번을 다 채우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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