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영의 잡동사니>

중(僧侶)의 높임말은 스님이고, 낮춤말은 중놈이라고도 한다. 낮춤말은 아니지만 중답지 못하고 불한당 같은 행세를 하는 자를 흔히 '땡초중'이라 불렀다. 흔히 '땡땡이중'이라고도 하는데 땡땡이중은 땡초와는 달리 풍물패를 만들어 꽹과리를 치면서 동냥을 다니던 중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하긴 땡초중도 땡땡이를 하기도 했으니 구분이 애매하기는 하다.

땡초는 땡추의 잘못된 말이다. 조선 중기 이후 학문이나 수행이 없는 승려들이 모여서 조직한 패거리들이 있었는데 이를 당취(黨聚)라고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땡추'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 숭유배불 정책으로 인하여 승려의 지위가 땅에 떨어져 민역(民役)과 병역(兵役)을 피하는 사람이나 고아, 과부 등이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었으므로 무자격 승려가 많이 생겼다.

수행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이들은 패거리를 만들어서 그들의 세력을 키웠다. 10여인 또는 20여인씩 패를 지어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거나 학문하는 승려를 괴롭혔고, 식량과 기타 물자를 빼앗아 먹고 입었으며, 승려에게 폭행도 하였다.
지금의 조폭처럼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통일된 행동을 하였으며, 어려운 일은 서로 도와주고, 조직원 중 누가 봉변을 당했을 때에는 반드시 복수를 하였다고 한다. 주색이나 고기를 제멋대로 취하는 가짜 중이었다.

조선말이 되어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여기저기 힘없는 작은 사찰들은 이런 자들이 중들을 쫓아내고 차지하기를 예사로 했고 여기에 처자식을 데려와 살기도 했다.
일제 때에는 일본 불교의 관행을 따라 처자식을 거느린 대처승이 절을 차지하고 있어도 흉이 안 되어 설령 땡추 출신이 아니더라도 대처승이 주지인 경우도 많았다.
그런 결과 광복이 된 이후 전국의 사찰들은 종통이 어디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무질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자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대처승은 중이 아니다'라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비구 종단이던 조계종은 대통령의 말에 힘입어 대처승이 차지하고 있었던 사찰들을 되찾고자 했으나 법대로 하기도 쉬운 일도 아니고 사법기관의 힘을 빌리기도 어렵자 자구책으로 폭력배를 승적에 입적시켜 대처승이 차지한 절을 강제로 빼앗게 했다. 이런 행동은 당시의 경찰도 종교 내부의 문제라고 핑계하고 묵인하여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계종단이 외형적으로는 국내 으뜸의 불교종단이 되기는 하였으나 폭력배를 들여온 후과는 만만치 않아 종내 분규가 있을 때마다 폭력이 난무하는 난장판을 이룬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진안 금당사의 주지가 교체되었는데 불교계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전임주지가 조계종단 총무원장선거에 흑색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불법으로 간여하고, 호법부 종무원에 대한 사회법 제소, 재산비위, 종무행정 거부·방해 등을 이유로 징계에 회부되어 조계종단에서 승적박탈이 되고 교체발령이 되었으나 불응하자 집행관을 동원 강제 퇴거 집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임 주지는 할 수 없이 퇴거를 했지만 전임 주지측 측근들은 자신들이 금당사의 사찰운영에 막대한 투자를 하여 그 투자금을 회수치 않고는 못나가겠다고 버티는 모양이다. 또 전임주지는 승적박탈에 대한 서울중앙지법 징계처분효력정지가처분 결정을 근거로 (승적박탈에 대하여 부당하다는 전임 주지의 소송에 대하여 법원의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지자 조계종은 승적박탈을 제적으로 일단 완화했다) 신임주지와 금산사, 총무원관계자, 집행관, 진안서 경찰관 등 50여명에 대해 불법주거침입 등의 혐의로 진안경찰서에 12월 6일 고소장을 제출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는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릴 일이지만 종교종단 내부의 일이 걸핏하면 소송이나 강제집행으로 번지는 일을 보면 조선시대 땡추중의 사례가 자꾸 상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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