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 이승수 진안우체국장, 수필가
'진안고원 마실 길' 제4구간 초입인 '성수면 오암' 마을은 만덕산 가는 옛길과 연해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정자나무가 있고, 고랭지 배추 벽화가 예쁜 공동창고가 있고, 가지런히 눈을 덮고 있는 휘어진 방천 둑이 있다. 광장에서 옛 주막집 자리를 보며 몸을 풀었다. '선인들은 이곳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고단한 몸을 달랜 후 저 산등성이를 넘었구나.' 매웠을 그 아침이 김 되어 어른거린다. 광목적삼에 짚신 한 켤레, 두건 하나로 이 한파와 맞섰을 테니 지금은 유가 아니다. 쳐졌던 어깨를 추어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출발이다. 생 눈 위에 발자국을 찍는 일은 행운이었다. 내가 처음이다는, 아니 누군가를 위한다는……. 동심이 되어버린 나는 자국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맨 앞으로 내달렸다.
길은 주로 강을 끼고 이어졌다. 산수의 빼어난 경관을 보면서 걷고 싶은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으리라. 어쩌면 조물주는 인간이 탐미하기 편하도록 지형을 만들어 놓고 찾아 나서게 하지 않았나 싶다. 제주 올레 길을 만든 서명숙 씨의 말이 떠오른다. "염소를 풀어놓고 따라가니 길이더라."라는. 풍혈냉천을 지나고 섬진강 본류를 따라가면서 길은 더욱 힘차게 굽이를 돈다.
 
원도통 마을에 이르니 마을회관 앞에 많은 주민이 몰려 있다. 달려가 보니 튀밥 튀는 아저씨가 출장 오신 날이란다. 요즘은 튀밥도 사장님을 모셔다 튄다고 했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방에 사천 원. 한 어르신 강냉이 보퉁이가 홀쭉해졌다. "사카린을 안 넣었어!" "그래서 더 죄송해요." 그러면서 한 움큼 더 쥐는 인간의 심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포장도로가 나온다. 쌩하고 달리는 승용차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잠시 상념에 잠긴다. 다리표지 옆에 음각으로 새겨진 파란 물고기가 막 헤엄을 칠 듯하다.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어 바라보고 있자니 박주홍 대원이 다가와 설명해준다. 얼마 전 '로드스쿨러'들이 다녀가면서 남겨준 선물이라고. 자기도 아이를 그곳에 보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며 말끝을 흐린다. 어떻게 하는 게 전인교육인지. 그 학생들 공부하는 모습이 궁금했다. 중평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부녀회에서 따뜻한 국물과 정갈한 반찬을 준비해줬다. 오랜만에 맛보는 두부 김칫국, 지금도 새콤한 맛 그 느낌이 입 안에 남아 있어 고맙고 행복하다. '두렁쇠가락 풍물 굿'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전국적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굿판에 끼어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아조개재'를 지나면서 임도가 시작된다. '도라꾸'가 지나간 듯 눈길이 깊이 파였다. 덕분에 대열은 양쪽으로 나뉘어 대화를 나누기에 좋았다. 제법 가파른 경사가 계속되는 길 가운데 눈이 심하게 흐트러진 곳이 있었다. 정병귀 팀장의 말인즉 멧돼지 떼가 뒹굴고 간 자리 같다고 했다. "조용히 해요, 멧돼지 숨소리가 들릴지도 몰라요!" 덕분에 뒤처진 대원들이 합류할 여유가 생겼다. 내동산 능선에 다다르니 천상이 따로 없다. 저 멀리 관촌 사선대와 청웅 백련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는 백운산이 손짓하고……. 잠시 일손을 놓은 한적한 들녘이 시름에 젖어 있다. 일명 백마산이라고도 불리는 내동산을 끼고 내려오자니 정상을 밟고 싶다는 생각이 치민다. 더 높이 올라 오늘 걸었던 길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다. '상염북'마을 '충목정'에 이른다. 벌써 도착지점에 왔다. 저 멀리 산 아래로 땅거미가 일고 있다. 고마운 무진장 여객이 무거운 발들을 걷어 준다. 영하 18°의 강추위 속 15.51km 꽃길은 꿈만 같았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진안고원 마실 길'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운 하루였다. 로드무비의 대명사로 불리는 영화〈아이다호〉에서 '마이크 워터스'가 한 말이 귓전을 울린다. "이 길과 똑같은 길을 본적은 한 번도 없어, 세상의 길은 모두 다르니까." 그렇다. 세상의 길은 모두 다르다. 남한 유일의 진안고원, 그곳에 펼쳐지는 무지개 길은 하늘길이다.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