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


강 점 철 씨
성수면 좌포리 양산마을 출신
(주)은강사 대표
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
백두산악회 고문
미래사진 모임 회장
대한민국 사진전람회 입선 3회
제물포 사진대전 대상입상(죽방림)
재경진안군민회 자문위원

목유소양칙근본고(木有所養則根本固)하고 이지엽무(而枝葉茂)하여 동량지재성(棟梁之材成)하고 수유소양칙천원장(水有所養則泉源壯)하고 이유파장(而流派長)하여 관개지이박(灌漑之利博)하니 인유소양칙지기대(人有所養則志氣大)하고 이식견명(而識見明)하여 충의지사출(忠義之士出)하니 가불양재(可不養哉)리오?(나무를 잘 기르면 좋은 재목이 나오고 물을 잘 다스리면 수원이 풍부하고 사람을 잘 기르면 뛰어난 인재가 나온다.)
명심보감 성심편(상)에 나오는 이 구절을 강점철씨는 금과옥조로 평생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나 개인보다는 주위를 그것도 인재없는 마을에서 자라나면서 마음에 깨달은 바 있었던 그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좌포국민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강점철씨는 마을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비롯하여 사자소학, 명심보감, 소학으로 자신의 소양을 마음에 쌓아간다.
용수평 앞냇가 흘러가는 물속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암소에게 풀을 뜯기고 있었던 그의 마음에 미친 바람처럼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를 강점철씨가 깨달은 것은 늦봄 앞산 봉우리로 하얀 뭉게구름이 몰려가고 소슬바람이 코 끝을 간지럽히는 5월 어느날 이었다. 집안의 한계를, 이 구석 농촌의 현실을 마음속에 너무나 뻔하게 깨닫고 있었던 강점철씨는 무엇인가 기술을 갖지 않고서는 이후를 헤쳐나갈 수가 없다는 마음의 결론을 실천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서울이다.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께서 흔하게 일깨워 주셨던 것은 “사람은 낳으면 서울로 보내야 하고 말은 낳으면 제주로 보내야 한다”는 당시 어른들의 흔한 사고방식에 그가 마음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하더래도 당시 그의 처지로는 어찌되었던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낯선 서울에서의 생활이란 당시(60년대) 모든 사람들이 겪었었던 그대로였다.
동판제판의 기술을 익히기 위하여 수년을 그리고 자타가 인정하는 그 계층의 기능공으로서의 십수년을 거치면서 그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주위사람들과의 교유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당에서 동아(童兒)시절 스승으로부터 꾸중처럼 들어왔었던 구절들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귓전을 울렸다.
원수(遠水)는 불구근화(不救近火)요 원친(遠親)은 불여근린(不如近隣)이니라. (멀리사는 친척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낫듯 일은 이론보다 실제를 더 중시하여라.)
그래서 이겠지만 그의 주위에는 항상 그를 필요로하는 이웃들이 꼬인다. 항상 강점철씨는 그들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포옹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숙명처럼 되어버린 인생의 철학으로 정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70년대 군에서 제대하고 나와서 객지에서의 그의 표현대로이라면 그 지긋지긋한 자취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일념하나로 이영회 여사와 중매한 결혼에 임하고 그리고 남의 집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의 (주)은강사를 창업하기에 이른다. 자신도 느꼈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듯 어렵다는 객지생활의 문턱을 넘어서 자수성가를 이루어갔다.
한숨을 돌리고 생각해보니 정말 쉼없이 앞만보고 달려온 그러한 세월이었다. 살아오면서 주위의 갈등들은 자신의 호양으로 베풀어 주었고 동종업자들과의 혹시라도 있었던 지역적 갈등들은 자신이 연마하고 익혀온 기술로 대처하여 주었다.
그러나 인생의 길역에 놓인 호사다마(좋은일에는 마가 들기 쉬움)라 하였던가. 그에게도 마음의 바람이 왔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부모처럼 믿고 의지하였던 그의 큰형이 당시 예비군 면대 소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여름 물놀이에서 회사를 당한 것이다.
조용하게 일상에 정착하여 가던 마음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방황이 시작되고 회의가 먹구름처럼 가슴을 뒤덮는다. 모순과 인생의 의미에 굉음을 일군다. 사진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전국을 주유하다 술에 취하여 아무데나 쓰러져 뒤죽박죽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파도가 거친 바닷가에서 <죽림방>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되면서도 아름다운 것인가를 깨달아 간다. 설악산의 대청봉을 등정하면서 심한 바람에 견디어가는 <나목>들의 끈질긴 견딤앞에서 그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있을 때 그는 천주교에 귀의한 요셉(세례명)이 되어 있었다.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도성을 떠나서 천성을 향하는 한 순례자의 여로(천로역정)처럼 인간의 고뇌와 회심과 인심의 박해속에서도 그는 고달픈 인생의 생애를 돌아서 돌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터를 짓고 살면서 죽은 후의 행복을 바라는 자는 깜부기를 심고 나서 자기 곳간을 보리나 밀로 채우라(천로역정)고 생각하는 자와 마찬가지라는 이론에 강점철씨는 적극적인 동의를 보낸다고 그랬다.
친구를 잃어버린 자는 자신의 신의를 짓밟는 자 만큼이나 우매한 자라고 믿고 있는 그는 많은 지지자들이 그의 곁에 있었을 때 또한 더 강한 대적자들이 그으 주위에서 웅성거렸음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정직을 제일의 생활철학으로 살아왔다. 그에게 정직은 신용이며 믿음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생명과 같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의 큰형이 좋아하였던 백합을 그는 좋아한다.
지금은 모두가 떠나온 고향이지만 거기엔 그의 코흘리개 시절의 숨겨두었던 비밀스러운 점이 있었고 지금 크게는 아니지만 남 못지않은 자수성가의 길에 서 있음을 그는 말한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뒷동산의 오솔길은 그가 나뭇짐을 지고 오르내리던 인내의 언덕이 있었고 앞산에 보이는 그의 선산에는 조상님들과 그의 부모님과 그가 못 잊어하는 형의 산소가 있다. 논두렁 길들은 아니지만 회지처럼 뚫려나간 신작로가 비롯 옛적 고향의 정취는 아니래도 언제던가 2남2녀의 그의 자녀들과 함께 그의 부부가 돌아가야 할 그의 고향인것을 강점철씨는 잊지 못한다.
40년전이던가 그의 형이 4H회원들과 함께 심었다는 마을 앞 느티나무 동굴깊이 이제 그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인 것을 어쩌랴? (H.P 011-745-2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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