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미의 문화산책
이용미 문화관광해설사

당당하고 중후한, 꽃을 든 남자는 우러러봐야 된다? 머리에 쓴 보관에 그려진 봉황과 화신들로 인해 화려하면서도 안정적 색감의 마이산금당사 괘불탱이랍니다.

가뭄이 심한 아주 오래전 어느 해 봄, 사람들은 금당사 스님을 찾아 가뭄을 해갈할 수 있는 방법을 요청했답니다. 간곡한 그들의 부탁에 주재하는 스님은 기우제를 올리도록 하자고 하고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가 사흘 만에 와서는 절 뒷마당에 사람형상을 그리더니 그곳을 백자만 파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 땅을 파라고 할까 궁금하면서도 예사스님이 아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곳을 파보니 한 폭의 괘불이 묻혀 있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꺼내어 걸고 기우제를 올리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전설을 가진, 절의 큰 행사 때 많은 사람이 법당에서 법회를 가질 수 없는 경우 야외에 걸고 행하는 것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크게 그려진 부처님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소망을 빌거나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불화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일 뿐, 이 탱화는 명원과 허헌 치헌과 위청이라는 화원과 1692년(조선숙종 19년)에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확실한 보물이랍니다.
석가가 깨달음의 표시로 말없이 연꽃가지를 들었을 때 열두 제자 중 가섭만이 빙긋 미소로 답을 했다는 염화시중의 이야기를 들어 이 보살을 석가라고도 하고, 화신보살과 봉황이 그려져 미래에 오실 부처님인 미륵보살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분명 조선 중기에 그렸는데 고려시대에 불렸다는 용출산 금당사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곳의 옛 어르신들이 아직도 속금산이라 하는 것과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안정된 시기가 되자 그 전에 희생된 많은 사람의 혼령을 달래는 법회가 많이 이루어지고 따라서 많은 괘불이 제작되었는데 이 괘불 역시 마찬가지로 숙종 때 장희빈이 중전으로 있을 때 제작된 것이라 하면 오래 기억이 되겠지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 사찰에 소장된 괘불은 51점으로 국보 7점과 보물 19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금당사 괘불은 작품형태나 보관상태가 좋아 양산 통도사 괘불, 부여 무량사 괘불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괘불로 치는 학자도 있답니다. 그러나 이런 괘불을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이 큰 아쉬움이지요. 그래서 작년 5월에서 8월까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불교회화실에서 열렸던 금당사괘불 테마전은 의미가 컸는데 가로가 4.55m 세로 8.29m로 3층에서야 눈높이가 맞춰지는 엄청난 크기는 보는 사람들이 압도당한다는 느낌이랄까요? 야외가 아닌 실내라서 더 그랬을 것입니다만 보는 이들의 감탄에 그 옆에 있던 제 맘이 우쭐했던 기억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그런 괘불을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아쉬움을 이제는 조금 덜 수 있어 다행입니다. 괘불을 모신 전각을 극락전 옆에 새로 마련하고 2분의 1 모사본을 걸어 놓아 원하는 누구라도 볼 수 있으니까요.

훨훨 날아갈 것 같은 팔작지붕아래 단아하게 자리한 전각 중앙에 걸린 괘불은 원본의 신비스럽고 안정감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활짝 열린 문으로 환한 볕 찾아들면 꽃을 든 남자의 중후하면서도 위엄 있는 얼굴에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 부처님의 미소가 번지는 또 다른 신비함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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