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길 군청 학예연구사

얼마 전, 진안군 관내 중·고등학생들과 20대 청년이 함께 하는 프로그램에서 보물 제746호로 지정된 ‘성석린좌명공신왕지’를 모셨던 동향의 어서각(御書閣)‘과 용담향교, 그리고 정천의 천황사와 이산묘 답사에 함께 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답사 중 용담향교의 문을 열어 줄 분이 없다는 사정이 있었고, 짜여진 일정에 맞추다 보니 용담향교는 들리지 못하였다. 대신에 침통같은 더위를 벗어나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수백 년 묵은 나무 그늘에서 잠시나마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천황사에 먼저 들렸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듯이 이산묘로 발길을 서둘렀다. 이산묘에 도착하여 100여 명의 학생과 관계자들에게 이산묘에 와 본 적이 있거나 영광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더니, 불과 5명 정도만 손을 들었다. 진안의 자랑인 마이산은 수차례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5% 정도만이 이산묘에 들렸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이 이러한 경우는 일컫는가!
해방 후 진안지역에서도 친일잔재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지는 이산묘였고 결과는 영광사(永光祠)였다. 1947년 이산묘를 중심으로 지역 인사들이 모여 1905(을사)년 이후 조국을 위해 한목숨 기꺼이 바친 순국선열 34위를 영광사에 모시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지침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영광사에 모셔져 있는 34위의 면면을 보면, 이들을 모신 관계자들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하여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죽음으로 항거한 송병선(宋秉璿)·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홍만식(洪萬植). 1907년 헤이그에서 조선의 독립국임을 주장한 뒤 순국한 이준(李儁) 열사와 독립운동에 나선 이상설(李相卨). 한말의 의병장 고광순(高光洵)·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민긍호(閔肯鎬)·이석용(李錫庸)·전기홍(全基泓)·고제량(高濟亮)·김용구(金容球)·김익중(金益中)·오인수(吳仁洙)·김도현(金道鉉).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잃게 되자 자결로 일제에 항거한 홍범식(洪範植)·김석진(金奭鎭)·정재건(鄭在健)·정동식(鄭東植)·이만도(李晩燾)·장태수(張泰秀)·이도발(柳道發)·황석(黃王奭))·김근배(金根培).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安重根) 의사.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실패 후 처형당한 이재명(李在明) 의사. 독립투사 이회영(李會榮)·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의사.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죽음으로 저항한 설진영(薛鎭永) 등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백범 김구 선생은 기금과 함께 글을 남겼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이었던 함태영의 글이 있으며, 이산묘 현판은 1949년 당시 부통령이던 시시형의 휘호로 현존하고 있다.
해방 60주년이 올해, 이산묘 영광사에 가서 이 곳에 모셔져 있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그 분들을 왜 모셨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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