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배인재 진안군장애인복지관 관장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정치사상가 홍세화 선생이 10년 전 쯤 어느 지역에서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되었다. 선생은 정치적 난민의 험난한 생활 속에서 택시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포용과 똘레랑스가 넘쳐나는 프랑스 파리생활을 역설하였다. 그런 유럽인들의 삶과 시스템이 멀고도 먼 이야기였지만 청중들에게는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회복지 실천가인 나는 대단히 죄송스럽게도 선생의 미래에 대한 노후계획을 당돌하게 여쭈었다. 물론 정치적 망명자였던 그에게 그럴싸한 노후계획은 준비되지 못했고,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보자는 각오를 다졌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생각해보면 빈손으로 고국에 돌아온 정치적 난민에게 참 예의 없는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다.

요즘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저자의 이름보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으로 더 유명한 책으로 알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효율과 무한경쟁을 강조한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는 이제 가고, 이제 삶의 질을 기반으로 한 사람 사는 세상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는 유러피언 드림'을 꿈꿔보자는 것인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우리 지역 사회복지계에서 선진 복지체계가 안착된 유럽연수를 기획하였고, 매우 운이 좋게도 그 연수대열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유럽방문의 첫 느낌은 매우 자유분방한 사회분위기와 다양성의 충분한 포용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잠시 나마 엿본 유럽 사람들의 삶은 풍요로워 보였고, 현재를 충분히 즐기고, 이방인들에게 커다란 부러움을 살만큼 행복해보였다. 물론 이러한 현실을 뒷받침하는 데에는 충분한 복지적 지지체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사회보장체계를 기반으로 한 각종의 연금과 복지수당이 설계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곳에는 우리나라 가정 경제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돈 먹는 사교육비에 대한 걱정도 없었고, 맹목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반값등록금 쟁취에 목숨을 걸고 있는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꿈만 같은 학비전액이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대다수의 국가들의 사례를 접할 적에는 더욱 그러했다. 특히, 자신의 임금만으로는 꿈꿀 수 없는 큰 집을 사기 위해서 부동산에 투자하지도 않았지만, 매년 떠들썩한 바캉스 휴가준비를 위한 세일행사와 가족 중심적인 신나는 휴가계획에 매우 높은 관심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에는 부러움의 극치를 경험했다. 도심을 살짝 벗어나면 각 가정마다 자신들의 마당을 가진 아담한 집안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짧은 근로시간 이후에 가족들과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은 행복함 그 자체였다. 마치 지상의 천국이 이런 게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국민연금연구원이 올해 4월 조사한 '우리나라 중ㆍ고령자의 경제생활 및 노후준비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은퇴 후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집단의 월평균 소득은 183만원에 달했다. 반면에 빠듯한 살림 탓에 국민연금을 넣지 않은 그룹의 은퇴 후 소득은 1인 가구 최저 생계비(49만845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평균 30만원 안팎이었다. 노후에 필요한 최소 생활비 평균치가 1인당 월 60만7,500원인 것을 감안해보면 우리 사회의 소득양극화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2011년 6월 말 현재 국민연금을 넣지 못하는 납부예외자는 전체 국민연금 가입자(1,953만5,000명)의 25%인 491만4,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 계층은 은퇴와 동시에 국민연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인 빈곤층으로 전락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상대적으로 노후생활의 불안감을 작심하고 조장해왔던 사적연금 시장이 지난해 처음으로 200조원을 돌파한 데 이어 올해는 250조원에 달할 전망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노후에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맡기고 매월 연금식으로 생활비를 받아쓰는 주택연금인 역모기지론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또한 매주 630만장(장당 1,000원)씩 63억원의 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도 늘 '없어서 못 팔' 정도의 연금복권이 활황이다. 매월 500만원씩 20년 동안 연금식으로 당첨금을 지급하는 복권당첨에 올인하는 중독성 문화가 이 여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은 도박처럼 오직 개인들의 한방에 기대하는 것일까? 상대적으로 노후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우리 군민들에게 갈 길은 멀고 해는 저물어가지만, 보편적 복지국가의 기반을 꼼꼼하게 설계하고 폭넓은 준비를 시작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홍세화 선생 말처럼 우리들에게 확실한 노후설계는 준비되지 못했지만,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갈 준비된 사람들에게 연대하고 협력할 의무는 시민으로서 당연하지 아니한가? 어떻게 보면 복지국가 논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우리들에게 다가올 기회와 상황은 가능성을 더욱 열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들의 노후를 위하여 보편적 복지국가 논쟁에 불을 확 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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