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영의 잡동사니>

도가니라는 말은 본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으로 용광로와 뜻이 같다. 여기에서 폐쇄된 그릇이라는 어감에서 '흥분이나 감격 따위로 들끓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더 쓰이게 되었다. 즉 "흥분의 도가니", "열광의 도가니"라는 식으로 많이 쓰인다.

영화 「도가니」가 하도 입술에 오르내리기에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사전 지식으로 처음부터 재미를 목적으로 관람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영 내내 가슴을 짓누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뭐랄까. 분함이랄까, 억울함이랄까, 아니면 슬픔이랄까. 아닌 게 아니라 나중에 알아보니 공지영의 원작소설 도가니는 '슬픔의 도가니'에서 제목을 취했단다.

여기에서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 보면,
좀 불우한 미술학도 강인호는 미술교수의 소개로 무진시에 있는 한 사립 청각장애인 학교를 찾는다. 그 학교의 행정실장은 강인호에게 교사로 취업하려면 1억은 받아야 하는데 5천만 원만 내라고 한다. 취업이 다급한 강인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알리자 어머니는 전세금을 빼내 돈을 보내온다. 세상에 파다한 교사채용 사학비리가 영화의 처음에 펼쳐짐에 관객들은 이미 영화의 결말을 내다본다.

강인호가 미술교사로 출근을 하자말자 학교에서 이상한 일이 연이어 일어난다. 닫아 걸린 화장실에서 여자애들의 비명소리가 들려 수위에게 물으면 장애아들이라 보통사람들과는 좀 틀린 엉뚱한 일을 하기도 한다고 둘러댄다. 막상 수업에 들어가 보면 분위기가 영 이상하다. 학생들이 무엇엔가 짓눌린 듯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이다.

또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학생들을 폭행하고 학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치 그 학교의 선생들은 모두 악당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만 확인하게 된다.
결국 어떤 경로를 통해 그 학교의 교장과 행정실장, 일부교사들이 청각장애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일삼았다는 것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그들은 법정에 서게 된다. 하지만 법정은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의 부모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한다.

여기에서 관객들은 절망한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약자들을 유린하는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이처럼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게 한 이유는 이 영화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현실이라는 점에 있다.

영화에서의 무진시는 실제로는 광주시란다. 하긴 광주의 고명(古名)은 무진주(武珍州)이기도 하다. 그 광주시에 소재하는 청각장애인 특수학교에서 6년 전 실제로 벌어진 일을 소설가 공지영이 취재한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란다.

영화에서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으로 극화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심에서는 모두 실형선고를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피해자들의 보호자들과 합의를 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미성년자에 대한 성추행이 친고죄여서 미성년자의 법정대리인인 부모나 조부모가 고소를 취소하면 처벌할 수 없게 되어 1심판결 이전에 고소가 취소되면 처벌할 수 없어 집행유예가 아니라 아예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항소심에서는 고소를 취소해야 효력이 없으므로 얼마든지 실형을 선고할 수 있다.

그러나 법원의 태도는 1심에서 고소를 취소했더라면 처벌할 수 없는 사람을 가혹하게 실형을 선고할 수 있느냐는 정상이 참작된 듯하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경찰이나 검찰, 법원 등 제도권이 얼마나 기득권 편인가를 잘 그려내고 있다. 아마 관객들도 진즉 그런 사회분위기를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토록 분노하고 절망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냄비근성만 아니라면 영화 한편이 사회를 바꿀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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