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대한민국은 하나

이 옥 동 씨
진안군 진안읍 연장리 출신
한국독립동지회 회장
대한민국헌정회 운영위원
재일본국한국거류민단 부단장 역임
제4대 국회의원
재경진안군민회 고문

 

먼저 고향 진안에 대한 긍지를 지적한다.
나라가 어려웠을때 독립운동의 본산지였으며 나라건국의 발상지로서의 이산묘에 대한 긍지에 대하여 역설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하나여야 하는거여.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남과북이 하나되어 통일된 조국을 보고싶은 거여.”
노안에 솟구쳐 일어나는 힘줄기가 쨍쨍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 함께 방안에 울렸다. 노구에 걸음조차 서투르듯 불편한 몸에도 아직 ㅓㄱ도 동경의 한복판에 잃어버린 나라의 유학생으로 동분서주하던 그 모습과 함께 재일교포 북송을 막으려고 뛰어다니던 젊은 시절의 패기는 한도 시들지 않은듯 하였다.
1922년, 나라가 한창 일본의 식민지로 신음하듯 숨죽여 가던 그 시절, 마이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진안보통학교를 거쳐 전주고등학교를 마치고 청원의 꿈을 안고 일본유학의 길에 오른다. 일본 중앙대 법학부에 입학하였던 것이 1940년대 일본이 마지막 단말마의 기승으로 식민지 조국을 압박하던 그 시절이었다. 그리고 한국유학생독립운동사건 학도지원병 반대투쟁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의 활동과 강제징용반대등에 연계되어 선생이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것은 6년여에 걸쳐 1947년 2월이었다.
불령선인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기 세네차례, 선생의 젊은시절이 그렇게 항일운동으로 일관되어 오는 동안 선생의 조국에 대한 무안한 애정과 고향에 대한 잊을 수 없는 향수는 누구보다 더 강한 이념의 투쟁으로 바뀌어 재일 거류민단의 창단과 조총련에 대한 배척운동, 재일조선인의 북송반대 등에서 보여주었던 선생의 일관된 투쟁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가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50년 6월 25일 조국에 사변이 일어나고 조국이 적토화 되어가는 위기에 처하자 재일본학국유학생들이 학도의용군 파견을 주장한것이거나 1944년 봄에는 재일 한국민내의 좌우 반목에 상처를 받아 공산세력을 배척하고자 조총련에 대항하여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등과 함께 재일본 한국거류민단을 창단하고 그 조직국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후 해방이후 친일파들의 득세에 공분한 선생은 그들과의 투쟁에서 공산세력과 친일세력을 민단내에서 제기하고 민단 부단장으로서 위치를 확보한다.
조선인 총연맹단체였던 세칭조련계는 재일교포를 삶의 천국인 북조선 조국으로 보내줄 것이라고 선전하고 나섰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재일교포들은 그저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가고 있었다. 그때 그들 좌익계 일본인들과 북한과의 칼갓타북송협정원의 허구성을 규탄하고 나선것이 민단이었다. 한국정부와 재일교포북송반대 전국위원회와 함께 전 국민과 전 세계에 그 진상을 알리고 규탄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으로 많은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끌려가서 뒤늦게 그들의 호도성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이옥동선생 등 당시의 민단지도자들은 지금도 그당시의 실상에 대하여 통탄하고 있으나 당시의 나라사정과 국제정세에 대처하지 못한 정부를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유학시절부터 시작된 오랜 재일거류민 시절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이제 조국에 헌신하고 싶어하는 선생의 앞길이 그렇게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귀국을 가로막는 장벽들도 도처에 있었다. 당시 고향 진안의 정치현실 역시 선생에게는 만만치 않은 장벽의 도전이 있었다. 당시 주중대사였던 김홍일 장군의 도움으로 김신씨(후일공군참모총장)가 고장난 비행기를 수리하여 귀국하는 비행기편에 편승하여 조용하게 참으로 조용하게 고국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고 선생은 술회하고 있었다.
그 의미야 어떻든 선생은 그렇게 조용하게 귀국하여 은거하고 있다가 1958년 5월 2일 제4대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하였다. 제4대 국회는 정치적으로 살펴보았을때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이나라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불행한 국회였고 또는 가장 의미 깊었던 국회였었다고 선생은 기억하고 있었다.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와 4.19의거, 국회의장 일가는 자결로서 그들의 죄를 민족앞에 씻고자 했고 일인독재에 길들여져 있었던 자유당 국회의 지도자들은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형무소에 직행하였거나 대통령은 하야하고 부정선거는 다시하게 하고 그리고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하였다.
이옥동선생은 이때의 그들을 바라보면서 정치무상과 권리무상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항일운동과 반공투쟁을 거쳐서 여기까지 다가온 자신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인생의 의미를 개달았다고 한다.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는 그 순간 선생은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단다.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그것보다도 자신의 신념을 택한 것이란다. 아직 이 나라에 내각책임제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선생의 신념이었다.
명동의 광장에 모인 400여명의 학생들의 내각제개헌반대 3의건에 대한 규탄대회가 있었다. 선생은 그들의 앞에 당당하게 서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설명하고 그 당위성을 설명한다.
일본유학이후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감당했었던 어느 집회에서보다 친일세력과의 다툼에서 보다도 공산세력들과의 투쟁에서 보다도 더 어렵고 더 간절하게 이들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선생은 선생이 갖고 있었던 온갖 정열과 끓는 피의 용솟음치는 그것을 다하여 학생들에게 외쳤다. 드디어 학생들의 웅성거리는 가운데에서 ‘이옥동의원 만세’ 소리가 터져나왔고 선생은 그 어느대보다도 감격에 담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년 1개월의 의원생활을 마친다. 이후 선생은 정치의 의미를 마감하고 독립유공자라는 그들 유가족들의 뒷바라지로 평생을 마치기로 결심한다.
1989년 8·15에서 선생은 대통령 건국표창을 비롯하여 1990년 8·15에서는 건국훈장 ‘민족장’을 수여 받았다. 이옥동선생은 이제 평생을 정리하는 자신의 여정에서 손님처럼 살아오기를 거부하고 항상 조국과 고향을 그리고 민족과 백성을 생각하며 그것이 옳은 길인것을 강조하며 걸어왔다고 하였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개란하면서 이남정권과 이북정권을 강조하는 반민족적인 이념투쟁을 경계한다고 하였다.
사후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이 예비되어 있으나 선생이 원하는 사후는 수목원으로 안장되어 젖길이 나있고 팔각정이 서 있는 공원화된 진안 선영에 무궁화꽃 울타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적도 동경에서 사자후를 토하면서 공산주의 자들의 분파행동을 호령하시던 선생의 노후가 신념없는 후배 정치인들의 귀감이 되어 고향 진안의 긍지에 채색되어 좋은 고향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참 좋겠다.
(H.P  019-587-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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