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뜸마을을 찾아서 (8) … 주천면 무릉지구

1월 23일 오후. 모처럼 푹한 날씨가 벌써 봄이 온 것 같다. 승용차 안에서 밖을 보니 여느 때보다 많은 주민이 집 밖에 나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정천면을 거쳐 주천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운장산과 운일암 반일암 때문인지 휴일도, 휴가철도 아닌데도 등산객과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계속 길을 따라 달리고 달리니 한 지점에 접어들면서 도로가 좁아진다. 버스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정도의 넓이다. 주천면 무릉지구에 다 도착한 모양이다. 이 좁은 도로를 따라 얼마 가지 않아 장승 두 개와 ‘으뜸 마을 가꾸기’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위엄에 나쁜 기운은 이 마을에 얼씬도 못할 것 같다.

▲ 새 경로당에 모인 노인들이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무릉도원’ 무릉리
무릉리는 본래 용담군 이서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뤄지면서 주천면에 편입됐다.
‘무릉(武陵)’이라는 명칭은 이 마을 주위의 산천이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명칭도 사실은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이름인데, 본 명칭은 어자리였다고 한다.
무릉리는 현재 어자마을, 강촌마을, 선암마을, 세 마을로 이뤄져 있다. 말이 세 마을이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모여있는 마을의 모습을 보면 그냥 한 마을처럼 보인다.
먼저, 어자마을은 큰마을과 양지말, 고네미를 합한 마을이다. 1700년경 김해 김씨와 은진 송씨가 제일 먼저 들어와 세운 마을로 알려지고 있는데, 큰마을을 두고 북쪽이 양지말, 동쪽이 고네미다. 고네미는 마을 모양이 고양이 형태라고 한다.

다음 선암마을은 선바우라는 바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큰마을 남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1840년경 김해 김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마지막 강촌마을은 아랫말로 불리던 곳으로, 큰마을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무릉리에는 현재 주민 180여 명이 터를 잡고 있으며, 농지는 80%가 밭이다. 마을이 해발 300~400미터에 있어 쌈채 등 고랭지 채소를 비롯한 밭작물과 산이 많은 덕에 생약도 많이 난다. 그래서 내년에는 1만8천 평 규모의 약초 식물원을 조성해 이것을 특화해나간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인삼 재배면적이 적은 편인데, 암반이 그릇처럼 마을 밑을 바치고 있는데다 점질토가 대부분이어서 인삼이 잘 안 되는 환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은 벼 생산에 좋아, 매우 맛이 좋은 쌀이 생산된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현재 이 마을은 밭 기반 정비사업으로 관수시설이 확충되고, 경지정리까지 되면서 농작업이 기계화돼 생산성이 높은 곳이다.
앞으로 무릉리는 기존 농사는 물론, 수익성이 높은 특용작물을 개발·재배해 소득을 높여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 흙벽으로 된 집 마당에 '보호수'임을 알리는 비석과 함께 늙은 대추나무가 가만히 서 있다.
◆무릉리의 전통의식
무릉리에는 산신제, 거리제, 탑제, 기우제, 뱅이 등의 전통의식이 있는데, 이 가운데 거리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거리제는 마을 어귀 왼쪽에 있는 소나무에서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열리는데, 소나무 주위에 금줄을 치고 풍물을 치며 마을사람 전체가 참여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탑제는 폐교(선봉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돌탑에서 제를 올리는 것으로, 마을에서 치마바위가 음기가 강해 이를 누르기 위해 돌탑을 세운 것이다. 제는 정월 초사흗날 거리제를 지낸 후 돌탑 앞에서 간단히 치른다.

산신제는 산짐승 피해가 많았기 때문에 지냈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예전 금산으로 향하던 오도재에 호랑이가 출몰해 주민들을 해쳤다고 한다.
기우제는 작은 열 골짜기라고 하는 무제치에서 지냈고, 이때 부녀자들이 물싸움을 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뱅이는 염병이 나돌 때, 부녀자들이 다른 마을에서 디딜방아를 훔쳐와 거꾸로 세우고 디딜방아에 여자의 아래속곳을 입히고 제를 올렸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아픔
무릉리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다수 모여든 마을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마을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 전쟁의 포화를 피하기에 적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발생했다. 정규군의 전투가 아닌 빨치산과 남쪽 자유대가 600 고지를 두고 전투를 크게 벌린 것이다.
당시 경찰로서 전투에 참가했던 정해선(79)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인민군은 구경도 못했어. 빨치산이었지. 남쪽에서는 경찰과 비정규군이 나서서 소통작전을 벌였는데, 죄없는 주민들이 많이 죽었지.”
당시 자유대는 공산당을 따랐다며 주민들을 해쳤고, 빨치산은 빨치산대로 남쪽을 따르는 주민들을 해쳤다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고, 생명을 잃는 것이 일반 백성들이다. 좌익과 우익,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순박한 우리 이웃들이 전쟁의 폭풍 속에서 그렇게 소중한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정말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이곳 ‘무릉리’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이다.

▲ 지난해 11월 문을 연 무릉보건진료소와 새로 지은 경로당이 마을의 변화를 얘기하는 것 같다.
◆사람이 찾는 으뜸 마을
무릉리는 더는 외진 산속 마을이 아니다. 매년 꾸준하게 젊은 귀농인들이 마을로 들어와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으며,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마감한 사람들도 노후에 정착하기 위해 이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2003년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선정되고, 또 으뜸 마을 가꾸기 대상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농촌체험과 농산물 직거래 등이 꽤 활성화돼 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이렇게 사람이 찾는 곳이다 보니, 이제 친환경 농업은 대세다. 아직 완벽한 수준은 아니지만, 먼저 친환경 농업의 필요성을 인식한 주민들을 중심으로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해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직거래를 하고 있다. 그 양도 매년 꾸준히 늘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운일암 반일암 등 인근지역 관광자원과 연계해 민박집과 식당을 운영하는 주민들도 일부 있다.
하지만, 한 주민은 마을이 ‘수익’만 좇아서는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낸다.
이 주민은 “농촌에서 마을 주민들이 마을청소처럼 함께 무엇을 하는 ‘공동노동’이 사라져 가고 있는데, 이것은 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수익성이 높은 한 가지 작목을 집중재배하는 것 역시도, 돈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이 주민은 “예전의 농촌처럼 각자 집에서 꽃을 기르고, 밭에서는 다양한 작물을 키운다면 농산물 구색을 맞추는 것은 물론, 경관농업이라는 최근의 흐름에도 부합하는 것.”이라며 “결국, 사람이 살기 좋은 예전의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 박종만
주천면 무릉지구 박종만(53) 으뜸 마을 추진위원장은 요즘 마을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귀농을 꿈꾸는 젊은 사람들과 직장 생활을 마치고 농촌에서 노후를 보내려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그저 너무나 익숙한 자신의 고향일 뿐이었지만, 꾸준하게 사람들이 찾고 외부의 평가를 접하면서 ‘무릉리’라는 마을 이름조차도 박 위원장에게 새롭게 다가온 모양이다.

“2003년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선정되고, 으뜸 마을 가꾸기 대상지역으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우리 마을이 갖고 있는 많은 잠재력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영농기반 정비를 위해 관수시설을 만들고, 경지정리로 기계를 이용한 경작이 가능하죠. 이러한 변화를 보면 우리 마을이 다른 마을보다 한발 더 앞서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 박 위원장은 마을에 들어온 새 정착민들과 기존 주민들을 어떻게 화합시켜 나갈지, 또 세 개 자연마을이 어떻게 힘을 모아 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변화를 추구하는 젊은 이주민들과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안정을 추구하는 기존 주민들의 상호 이해와 협력만이 마을을 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세 개 마을이 자기 마을만의 이익만 좇지 않고 하나의 공동체가 됐을 때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분명 으뜸 마을로서 성공하려면, 진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며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마을에서는 이미 작은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고, 언젠가는 모두가 공감하는 그런 마을이 될 것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험난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이해가 조금은 부딪치지만, 박 위원장은 여전히 마을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일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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