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7
성수면 좌산리 (마지막) 원좌산

 지난 주말 전국이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로 몸살을 앓았다. 하늘은 온통 누런 황사로 가득했고, 외출한 사람들은 숨 쉬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4월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월요일(2일)부터는 ‘언제 그랬냐?’라는 듯 황사가 많이 거쳤다. 누렇던 하늘이 비로소 파란 제 색깔을 찾았다. 하지만, 황사가 물러난 자리에는 추위가 찾아왔다. 우리 고장과 이웃한 임실군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고 한다. 산과 들에 알록달록 피어난 꽃을 시샘하는 추위다. 심지어 ‘원좌산 마을’을 찾았던 화요일(3일)에는 찬 칼바람과 눈발이 날리기까지 했다. 계절이 거꾸로 가는 것 같다.

 

4회에 걸친 성수면 좌산리 이야기의 마지막은 ‘원좌산’ 마을이다.

인근 지역의 교통과 경제의 중심지 구실을 해왔던 이 마을은 최근 변화를 위한 움직임으로 꿈틀대고 있다. 노인이 많고 인구가 계속 줄고 있어 빠른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보다 살기 좋은 마을을 가꾸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준비해 나가고 있다.


▲ 원좌산 생활문화관 옥상에서 바라본 원좌산 마을. 사진에서 보이는 산과 그 앞 농지는 임실군 관촌면에 속한다. 거리라고 해야 작은 하천 하나 건너면 되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원좌산 마을 주민들은 관할 행정기관이 달라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형편이다.
◆좌산리의 원 마을

본래 ‘좌산’이라는 마을 이름은 지형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면 마을 뒷산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인 ‘와우혈(臥牛穴)’인데, 소머리가 왼쪽으로 있기 때문에 ‘좌산(佐山)’이라는 명칭을 갖게 됐다고 한다. 여기에 ‘좌산리의 원 마을’이란 뜻이 더해져 지금의 ‘원좌산’이 된 것이다.

 

이 마을에는 광복 이전까지 당산제가 이어졌다고 한다. 지금 사라진 좌산초등학교 뒤 당산나무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무제도 지냈다고 전해진다.

또 좌산리의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도 물이 많이 부족했는데, 가뭄이 들면 마을에서는 방미산(배미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단다. 현재는 저수지가 확충돼 물이 부족하지는 않다.

어쨌든 이러한 마을의 전통은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되면서 사라지고, 노인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 마을 주민들과 출향인이 힘을 모아 건립한 원좌산 생활문화관.
◆한 가족처럼 지내는 마을

원좌산은 성수면과 백운면, 임실군 관촌면의 중앙이면서 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교통의 요충지다. 성수면과 백운면 사람들이 관촌면으로 가거나, 관촌면 사람들이 성수면이나 백운면 방향으로 가려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원좌산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큰 주점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위치와 특징 때문에 집성촌인 인근 마을과 달리, 원좌산은 김, 이, 임, 전, 박, 최씨 등 다양한 성씨의 주민들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입향조에서도 알 수 있는데, 조선 숙종 때 남원 이백면에서 들어온 순흥인 안상렬, 고종 병신년에 남원 아산방에서 들어온 경주인 김순식, 고종 경자년에 임실군 관촌면 한산리에서 들어온 문화인 유지홍, 고종 을미년 완주군 상관면 색장리에서 들어온 조양인 임철순 등이 입향조라고 기록돼 있다.

 

이렇게 마을이 각성바지임에도 마을 사람들은 한 가족처럼 지낸다. 겨울이나, 비가 와서 일을 할 수 없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은 마을회관인 ‘원좌산 생활문화관’에 모여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지낸다. 농사일에서도 주민들은 서로 도우며 일을 하는데, 농기계를 가진 주민과 없는 주민들은 서로 일을 나눠가며 농사를 짓는다.

 

특히 마을 사람들의 단합을 볼 수 있는 것은 마을에 큰일이 났을 경우란다.

예전에 마을에 불이 난 적이 있었는데, 소방서도 멀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직접 연장을 챙겨 화재 현장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날 마을 사람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불을 껐는데, 소방서에서 나와도 금방 잡지 못했을 큰불을 바로 진화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서로 이웃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 김재술씨가 익산시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손녀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아이 울음소리 끊겨

1960~1970년대만 해도 이 마을에는 150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이 많아 이 마을을 지나가야만 하는 인근 지역 사람들도 함부로 마을을 지날 수 없었을 정도였단다.

당시에는 집집에 어린아이들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이 울음소리 때문에 짜증이 날 정도로 어린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린이가 많았던 만큼 이 마을에는 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문을 닫은 좌산초등학교는 1999년까지 41회에 걸쳐 1천54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51년 5월1일 ‘외궁국민학교 좌산분교장’으로 개교한 이 학교는 1957년 4월3일 ‘좌산국민학교’로 승격됐지만, 이후 인구 감소와 함께 학생수가 줄면서 1999년 외궁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다.

 

현재 원좌산에는 40가구 정도만 실제 거주하고 있으며, 마을에서 청년에 속하는 50~60대 남성 4~5명이 각종 마을 일을 챙기고 있단다.

 

▲ 구름이 걷힌 후 이영옥씨가 집 마당에서 메주콩을 말리고 있다.
◆다리 하나 건너면 임실

원좌산은 크지 않은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임실군 관촌면과 이웃해 있다. 그렇다 보니 마을에서는 하천을 건너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꽤 많다. 하지만, 행정구역이 달라 각종 지원 혜택은 물론 큰 불편도 감수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한 주민은 마을에서 가까운 임실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친환경인증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관할구역이 다르기 때문에 농산물품질관리원 진안^장수지원이 아닌 멀리 전주시까지 가야 했다.

또, 임실군에서는 실제 임실군 주민이 경작하는 농지가 아니기 때문에 농로포장 같은 지원사업에서 원좌산과 인접한 지역을 후순위로 미뤄두었다. 자연재해 같은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도 우리 군이 아닌 임실군에 가서 보상^복구를 신청해야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마을주민들은 행정의 효율성이나 주민 편익을 위해 지형을 고려한 행정기관의 업무 배분과 공유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마을에서 가장 젊은 청년이라는 전기정씨가 담배 재배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

마을 곳곳을 돌아보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전기정(53)씨를 만났다. 전기정씨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데, 마을에서 가장 젊은 ‘심부름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전씨는 이 마을의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는 고추농사를 계속 지었는데, 지난해까지 역병이 들면서 많은 손해를 봤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는 600여 평의 밭에 담배를 심으려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농촌과 농민이 변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살 수 없어요. 농약을 덜 치고 친환경 농업으로 가야 해요. 이것은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농촌이 사는 방법이에요.”

 

전기정씨가 자신의 농사 철학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실제 전씨는 일부 친환경인증을 받은 작목을 재배하고 있다. 또 미생물을 이용해 재배한 고품질 배추를 계약재배하면서, 지난해 배추값 폭락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전기정씨는 이런 나름의 노력과 성과를 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했다.

“우리 마을에서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마을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오가고 있어요.”

 

전기정씨는 최근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계속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다시 들어올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마을이 발전할 수 있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대안이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마을에서 많은 교감이 있다는 게 전씨의 설명이었다.

 

“일단 문화마을처럼 구획을 정리하고, 주택을 새로 짓거나 보수하자는 겁니다. 일부 반대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마을이 발전하기 위해서 이런 사업이 필요하다는데 많은 분이 공감하고 계세요.”

전기정씨와 헤어지고 마을에서 가까운 밭에서 일하고 있는 김만곤(59)씨를 만났다.

김만곤씨 역시 마을에서 청년에 속하는 일꾼인데, 이날은 감자를 심기 위해 기계로 비닐을 씌우는 중이었다.

 

“우리 마을은 토질이 참 좋아요. 보는 것처럼 흙이 검은 게 건강해 보이잖아요? 그 때문에 고추, 인삼 등이 잘 되는 모양이에요. 여기에서 재배한 감자도 아주 맛이 좋아요.”

김씨가 기계를 이용해 밭 이랑에 비닐을 씌우는 사이, 김씨의 다른 밭에서는 품앗이를 나온 마을 주민들이 씨감자를 심고 있었다.

“하필 일하려고 하니까 갑자기 추워지네.”

 

최장옥(79)씨와 정오달(75)씨가 감자 심기를 마무리하며 이야기한다. 함께 일을 나온 두 명의 주민은 남은 씨감자와 호미를 챙기고 서둘러 김만곤씨가 일하고 있는 밭으로 이동했다. 날이 추워서 빨리 끝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발길을 돌려 마을 골목길을 따라 걷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집 마당에서 메주콩을 말리고 있는 이영옥(76)씨를 만났다. 마당에는 벚꽃을 비롯한 다양한 꽃이 막 피기 시작했는데, 이영옥씨가 직접 심은 것들이란다.

 

▲ 김만곤씨가 감자밭에 비닐을 덮고 있다.
이씨는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다며 집에 들어가 잠깐 차 한 잔 하라고 권한다. 마침 남편인 김재술(76)씨가 있으니 취재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방 안에 들어가니 김재술씨가 신문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우리 손녀가 익산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신문에 나왔어요.”

 

익산시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인 ‘익산신문’에 큼지막한 사진과 기사가 보였다. 백제초등학교에 다니는 김진아 교사가 발표 수업 등으로 학생들의 창의력을 높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재술씨는 마을의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여기가 진안군의 8대 명당 가운데 하나라고 하잖아요? 그것 때문인지 인물이 많이 나왔어요. 옛날에 김병은이라는 축구선수가 한 명 있었는데, 수비수 위치에서 공을 차면 반대편 끝에서 그 공을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고 해요. 전라북도에서 아주 유명했던 양반이에요. 그리고 근래에는 전 군수였던 임수진씨가 있잖아요? 이번에 농촌공사 사장이 된 것도 그렇고요.”

김재술씨는 특히 마을 사람들의 일치단결을 강조해 이야기했다. 앞서 얘기한 화재 진화도 김재술씨가 해준 이야기다.

 

“우리 마을은 뭘 하기만 하면 다 잘 됐어요. 지금도 젊은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있는 사람들이 마을일을 열심히 챙겨요. 그렇게 융화가 잘 되니까 큰 마을회관도 지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김씨는 마을 주민이 ‘이웃’이 아닌 ‘가족’이라고 강조했다.

 

김재술씨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밖으로 나오니, 잔뜩 찌푸리고 눈발까지 날렸던 하늘이 파랗게 개었다. 한창 취재를 할 때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불던 바람도 잦아들었다.

밝은 햇빛 아래 곳곳에 핀 봄꽃이 제 색깔을 더 뽐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추위에 움츠렸던 봄기운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예쁘게 피는 봄꽃처럼 좌산리 주민들의 얼굴도 환한 웃음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마을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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