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 (12) 성수면 구신리(3) … (3)장성

▲ 약도
무더위가 잠시 후퇴한 자리를 장맛비가 빼앗았다. 추적추적 가는 빗줄기가 뿌옇게 흩뿌리는데 우산은 쓰나 안 쓰나 마찬가지다. 주위에 높은 산은 낮은 비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얗게 가려진 모습이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것 같다.
지난 10일 찾은 장성마을 역시 그랬다. 마을 뒤 높이 솟아 있을 내동산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마을을 깜싸고 있는 장군대좌날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을에 인접한 논과 밭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집집이 대문 옆에 있는 외양간의 황소는 궂은 날씨 때문인지 가만히 누워 있었다.

▲ 장성마을 전경. 사진에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가 장군대좌날이다.
◆장군대좌날이 감싼 마을
장성마을은 염북마을과 원구신마을 사이에 있는 크지 않은 마을이다. 
맞은편으로는 좁은 하천 하나를 경계로 임실군 관촌면 운수리 구암마을과 이웃해 있다.
이 마을은 1800년께에 전주 이씨가 정착하면서 이뤄졌다고 전해진다. 지금 장성마을에는 모두 14집이 있는데, 이 가운데 두 집만 빼고는 모두 전주 이씨라고 한다.

‘장성(長城)’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옛날, 이 마을에 정승이 살았다고 해 ‘장상(將相)’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의 장성이 됐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을 지형이 긴 성을 쌓은 형국이어서 장성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다.

여하튼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지명으로만 봤을 때는 후자 쪽에 가깝다. 마을 한쪽을 감싸고 있는 장군대좌(將軍對坐)날이 길게 뻗은 모습도 후자를 염두해 두고 보면 장성의 모습 같기도 하다.
전체적인 마을의 지형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를 갖고 있다. 북쪽으로 내동산이 버티고 있고, 장군대좌날과 청룡줄기가 양옆으로 뻗어 있다.

산이 많은 지형 때문에 이 마을 역시 농번기엔 물이 부족하다고 한다. 예전에는 내동산에서 구신리 모든 마을이 함께 기우제를 올렸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요즘엔 농업용수로 지하수를 많이 뽑아 사용한다고 한다. 
  

▲ 4년 전에 만들었다는 마을회관
◆잘 정리된 마을 모습
구신리의 네 마을을 잇는 도로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먼저 왼쪽으로 비석이 보인다. 아녀자들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인데, 이 가운데 두 개는 영모각이라는 이름의 전각 안에 있었고, 다른 두 개는 영모각 옆에 나란히 서 있다. 최근에 누군가 벌초를 했는지 주변은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여기를 지나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공터 한쪽엔 터를 돋워 세운 마을회관이 있다. 지은 지 4년이 됐다는 이 마을회관은 텅 비어 있었다. 겨울 농한기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웠지만, 지금은 농번기라서 모두들 농사에 바빠 마을회관을 찾지 못하고 있단다.

그 옆으로 오래돼 보이는 낡은 정자 하나가 눈에 띈다.
마을회관이 지어지기 전에는 마을 주민들의 쉼터이면서 마을회관 구실까지 했던 정자였는데, 만든 지 60년이 넘었을 거라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광장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왼쪽 길은 양쪽으로 집이 늘어서 있는데, 길 끝은 마을 이장 집이다. 가운데 난 길은 마을 안쪽에 있는 여러 집을 잇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난 길은 논을 가로 질러 건너편 농로를 잇고 있다.

오른쪽 길을 따라 내려가 다시 농로를 따라 도로 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큰 나무와 함께 좁은 길이 보인다. 이 길은 예전에 도로가 놓이기 전 인근 사람들이 진안으로 향하던 고갯길로 오르는 길이다. 물론 지금은 주민 대부분이 자가용 자동차와 버스를 이용하고 있어 제 구실을 잃은 지 오래됐다.
  

▲ 집집이 있는 외양간과 황소
◆집집이 외양간마다 황소
마을을 돌아보면 장성마을은 집집이 황소를 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집에는 대문 옆 흙으로 만든 낡은 외양간부터 쇠 파이프로 새로 지은 우사까지 규모도 다양했다. 하지만, 소고기 수입에 따른 소 가격 하락에 대한 주민들의 우려가 컸다.

“농촌이라는 곳이 참 큰 위기를 맞고 있어요. 농사는 지으면 지을수록 손해고, 소고기 수입으로 소 가격은 계속 내려가고…. 예전에는 황소를 사려고 장사꾼들이 마을에 찾아오기도 했는데, 요즘엔 장사꾼을 불러도 안 오지 뭐예요.”

집 마당에서 고추 건조기를 손보고 있던 이우상(71)씨의 얘기다. 이씨는 하염북에 오래 살다가 지난 6월2일에 고향인 장성마을로 이사를 왔다. 이씨도 다른 주민과 마찬가지로 소를 키우는데, 날로 가격이 오르는 사료를 대기도 버거운 모양이었다. 

또 마을에서 가장 젊다는 이병엽(42)씨는 황소 23마리를 기르고 있는데, 역시 소 가격 때문에 걱정이 컸다.
“소고기 수입 때문에 소 가격이 내려 큰일이에요. 이제 팔 수도 없고 계속 갖고 있어야 할 모양이에요.”
  

▲ 고추 건조기를 손보고 있는 이우상씨.
◆농촌일수록 학교가 중요해
구신리의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장성마을도 밭작물 재배가 많다. 비율로 보면 벼농사 반, 밭농사 반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예전엔 장성마을도 담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 둘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고 노인들만 마을에 남으면서 담배농사는 점차 마을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교육 때문에 그럴 거예요. 하염북에 있던 초등학교가 계속 있었으면 지금보다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교통도 좋고 생활하기에 불편한 것도 없는데 젊은 사람들이 떠난다는 건 교육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농촌일수록 학교가 중요한 거예요.”

이우상씨는 한 때 하염북에 있던 성신초등학교에서 서기로 있었기 때문에 농촌에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었다.

▲ 장성마을 공터에 있는 60년 된 마을 정자.

▲ 영모각 안에 있는 효부ㆍ효열비
장성마을을 알리는 돌 이정표를 지나 마을 길을 따라 들어가면 왼쪽으로 비석 네 개가 나란히 서 있다.
네 비석은 효부와 효열을 기리고 있는데, 이 가운데 오래된 비석 두 개는 ‘영모각(永慕閣)’이라는 건축물 안에 서 있다. 영모각 밖에는 비석의 유래를 적어놓은 안내판이 있다.

먼저 열녀비는 다음과 같은 유래를 담고 있다.
 【열녀 숙부인(1846∼1874)은 인자하고 부덕한 인품으로 어른과 남편을 섬김에 한치의 소홀함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이 괴질을 앓게 되자 숙부인은 정성껏 남편을 간호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이에 숙부인은 자신의 살을 베어내 약으로 조제, 이것을 남편에게 먹여 마침내 회생케 하였다. 그 후 숙부인은 살을 베어낸 후유증으로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다음 효열비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효열 숙부인(1877∼1970)은 남편과 웃어른을 보살피며 근면하게 살았다. 그런데 남편이 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손가락을 잘라 생혈을 복용시키는 등 간병에 지극정성을 다 하였지만, 남편은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숙부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기울어가는 가업을 극복하며 생활했다. 하지만, 업친데 덮친 격으로 시모가 중환을 얻게 돼 숙부인은 조석으로 돌봐 마침내 회생케 했다. 그 후 숙부인은 슬하 8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우고, 94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열녀와 효열의 전통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주민 대부분이 전통을 중시하는 전주 이씨이기 때문이라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마을에서 만난 이우상씨의 경우도 어머니가 진안향교와 종중에서 각각 효부상을 받았다고 했다.

▲ 영모각 옆 공터에 있는 효부ㆍ효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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