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14) 백운면 남계리(1) … 오정

▲ 마을약도
백운면 남계리는 지난 호에 소개했던 성수면 구신리와 높지 않은 고개를 경계로 이웃해 있다. 원남계와 분토동, 오정 등 세 자연마을로 이뤄진 남계리는 넓은 뜰을 끼고 있어 벼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많으며, 마을 주변 밭에서는 고추 등 밭작물 재배가 활발하다.
기록에 따르면 남계리는 본래 진안군 남면 지역으로 남쪽으로 내가 흘러 ‘남계(南溪)’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고 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오정(五井), 용정(龍井), 분토동(奔兎洞), 무등리(茂等里)의 일부를 병합하면서 만들어졌다.

▲ 마을 입구에 있는 300살 느티나무와 정자
◆마을 지키는 300살 느티나무
낮은 비구름이 이따금 소나기를 뿌린다. 불어오는 바람은 많은 습기를 머금고 있어 피부를 끈적이게 했다.
백운면에서 임실군으로 넘어가는 국도 30호선을 따라가다 임실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오르기 직전 오른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백운면 남계리 오정마을이다.

도로 가에는 한 때 가계로 운영했던 집 한 채가 보이고, 마을길 초입에 돌로 만든 마을이정표가 보인다. 마을을 바라보면 도로 방향을 제외한 삼 면이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해 보인다.
일단 마을에 들어서면 커다랗고 멋스러운 느티나무와 그 아래 정자가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마을 입구에서 대문 구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느티나무는 수령이 300년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높이만 20m 가까이 된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정자 근처에는 효행비 하나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묻은 채 서 있다. 효행비의 주인공은 부모님 상을 치르고 3년간 묘소를 찾아가 돌본 전태성씨 부부로, 마을에서 그 아름다운 효행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마을 주민 이야기에 따르면 전태성씨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광복 전후쯤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렇게 마을 입구는 듬직한 정자나무와 정자, 효행비가 어울리면서 나쁜 기운을 막아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 예전 마을의 다섯 우물 가운데 하나가 있던 곳. 누군가 집을 지으면서 덮어버렸는데, 지금은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조그만 웅덩이가 됐다.
◆다섯 샘물 물맛은 기억에만
마을 이름이 유래한 다섯 개의 샘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새로 도로를 내고 집을 지으면서 모두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맛이 어디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 좋았어요. 그런데 신작로를 내고 젊은 사람들이 집을 짓는다면서 모두 덮어버렸지 뭐예요. 지금 멀리 계곡에서 뽑은 지하수도 물이 좋지만, 그래도 샘물이 계속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을 뒤 고추밭에서 일을 하던 75세의 한 주민을 만났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손사래를 치며 멀리 가서 이름을 묻지 못했다. 하지만, 이 주민은 예전 샘물의 모양과 위치, 물맛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저기가 샘이 있던 자리에요.”

이 주민이 가리킨 곳에서는 작은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었는데, 계속 물이 흘러나왔다. 옆을 지나오면서 빗물이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이 바로 샘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샘물이 많았어도 옛날에는 물이 부족할 때가 잦았던 모양이다. 기록에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사자봉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준비해 기우제를 지냈고, 이와 함께 마을 앞 다리 밑에 있는 넓적한 ‘갈마바위’와 물이 있는 ‘갈마소’ 근처에서 물싸움을 했다고 한다.
  

▲ 마을 오른쪽 산줄기는 최씨 종산이다. 이곳에 있는 멋진 토종 소나무가 참 보기 좋다.
◆그림 같은 소나무 나란히
마을 뒤 나지막한 산을 넘어가는 고갯길을 둘러보았다. 성수면 구신리로 넘어가는 길인데, 마을에서는 ‘뒷재’라고 부르고, 어떤 기록에는 ‘배남정이재’라고 기록돼 있다. 기록에서는 옛날 고개 정상에 배나무로 지은 정자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날 만난 마을 주민들 가운데는 그 정자를 본 적 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없었다. 고갯길은 자동차로 갈 수 있을 정도로 포장이 잘 됐다. 이 길은 구신리로 이어지는 도로와 만난다.

고갯길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탁 트인 마을 앞쪽으로 넓은 뜰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마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런 얘기가 전한다. 오정마을은 풍수지리상 개혈, 소쿠리안, 조개혈 등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마을 오른쪽 맥이 용머리에 해당하는데, 어느 해인가 용머리 부분의 나무를 벤 다음 마을에 젊은 사람이 죽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뒤쪽에서 마을 앞뜰을 바라봤을 때, 왼쪽 산줄기에는 보기 좋은 소나무 여러 그루가 눈에 띈다. 나무가 크기도 하지만, 모양새가 전통 한국화에서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최씨의 종산이라고 하는데, 마을과 종친에서 일부러 나무를 관리한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멋들어진 소나무가 자라는 산줄기 안쪽 고개는 ‘백정골’이라고 불린다.
예전에 백정이 살았다는 얘기도 있고, 마을에서 소와 돼지를 잡을 때 그곳에서 도살했다는 얘기도 있다. 
  

▲ 마을 밑단에 있는 마을회관
◆노인 대부분인 마을
마을 주변을 살펴보고 마을 골목을 돌았다. 그러다 집 마당에 꾸며놓은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김아무(78) 노인을 만났다.
“아이고. 약 안 치면 사람 먹을 게 없고, 약을 치면 사람이 병드니 이걸 어떻게 해.”

김 노인은 낫으로 참 자란 파를 잘라내며 계속 이야기했다. 텃밭에 심어놓은 몇 가지 야채가 잦은 비와 흐린 날씨 때문에 병들고 벌레가 껴서 모두 잘라내는 중이었다. 김씨는 베어낸 야채를 다시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으로 나눠야 했는데, 절반도 건지지 못할 것 같았다.

“난 자식도 없고 집도 없고 몸뚱어리 하나뿐이야.”
김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신세만 한탄했다.
여느 농촌 마을과 마찬가지로 오정마을 역시 노인이 많다. 이날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 상당수가 70대 중반을 넘어선 노인들이었는데, 모두 논과 밭에서 일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현재 오정마을에는 23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30가구 이상이 살았고, 집집이 아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셋이 전부란다.
  

▲ 철과 기계를 만질 수 있는 기술이 있어 마을에서 많은 일을 하는 최영택씨. 최씨뿐만 아니라 씨름선수인 최씨의 아들은 마을의 자랑이었다.
◆오정마을의 일꾼들
마을 곳곳을 둘러보다가 한 작업장에서 이장수(55) 이장과 최영택(48)씨를 만났다. 이 작업장은 최영택씨의 개인 작업장인데, 최씨가 예전에 철공소에서 갈고 닦은 용접기술 덕에 마을의 남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됐다고 한다.

이날 최영택씨는 굴착기 수리와 시멘트를 비비는 커다란 철제 통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크게 돈 잘 버는 사람이 나오지는 않아도, 아주 잘못되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편안한 마을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올해부터 오정마을 이장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는 이장수 이장은 마을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마을의 유래와 특성, 특산품, 인심 등이었다.
“나보다 저 친구를 취재해요. 아들이 씨름선수예요.”

최씨에게는 전주대학교에서 씨름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아들이 있는데 마을의 자랑거리인 모양이다. 최씨 집안 남자들은 체격이 좋고 힘이 세다고 하는데, 그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최영택씨는 젊어서 철공소에서 10여 년을 일했다. 그러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손수 만들다 보니 이웃들이 부탁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요즘엔 최씨 개인 작업장이 마을 작업장이 되어 버렸다. 되도록 이웃의 일은 안 하려 했지만, 찾아와 부탁하는 사람들을 뿌리칠 수 없었다.

최씨의 작업장을 나와 다시 마을 진입로로 나가 정자나무 아래에 섰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개면서 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치면서 기온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았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정자나무 나뭇잎이 만들어낸 소리는 시원했다.

▲ 백정이 살았을 거라는 얘기가 전해지는 백정골

▲ 마을사람들이 뒷재라고 부르는 고갯길. 이 고개를 넘으면 성수면 구신리로 갈 수 있다. 옛날에는 정상께에 배나무로 만든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포장이 잘 돼 있어 자동차도 다닐 수 있어 지금도 주민들이 애용하는 길이다.

  

▲ 마을 입구에 있는 전태성씨 부부 효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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