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그대 사랑 책갈피에…" (39)

▲ 지음: 안도현 출판: 리즈 앤 북
안도현은 시인이다. 시인이 쓰는 동화는 동화적 상상력에 시적인 언어의 결합으로 태어나는 것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인가! 그런 생각으로 책을 놓고도 하루 이틀을 지냈다.
맛도 향도 재료도 느껴보지 못하는 허기로 활자를 삼키기 싫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그의 이름으로 나온 ‘연어’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던 탓으로.

어린시절 주인공이 마음속에 새긴 영웅은 알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 판수다. 그를 등장시키기 위해 저자는 알리의 일대기를 요약한다. 내겐 그것이 좀은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의 영웅에 대한 정의- 수 만 대군을 이끌고 적을 물리친 장수만 영웅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일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웅인 것이다. 는 공감이 가지만 주인공 알리가 영웅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거므튀튀한 피부색에 뭉특한 코, 썰어 접시에 담으면 한 사발은 됨직한 두터운 입술로 알리라는 별명을 갖게 된 친구 알리는 겉모습만 봐서는 바보 축에 든다. 영웅은 아마도 결말을 위한 미처 숨기지 못한 장치인 듯 싶다.

“ 어른들은 아이들의 단순성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이란 단순한 존재며 때로 친구한테 조건 없이 관대한 법이다” 라는 설명 대신 아이의 단순한 말 그대로를, 어른들의 무관심과 몰이해를 드러내는 퉁명한 말을 그만의 시어로 듣고 싶었다. 이렇게 말이다.

“알리네 집은 마을 뒷산의 제일 위쪽 언덕배기에 있었다 ... 우리집에서 바라보면 알리네 집이 한 눈에 보였다. 북쪽으로 난 들창문을 열고 바라보면 내 눈썹위에 그 애네 집이 걸렸다.... 고개를 조금 숙이면 내 머리꼭지에 올라앉았고, 턱을 좀 치켜들면 내 입술 위에 달라붙었다..... 창가에서서 내 얼굴에 알리네 집을 붙였다 뗏다 하면서 놀았다.”

이런 대목들을 만날 때 내 입술엔 미소가 물려 있었다. 작가를 안다는 것이 때로는 이렇게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어 준다는 것을 다시 새겼다. 어쨋든 주인공의 유년시절에 비친 사회의 흐름과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당연시 되던 아이들에 대한 무관심과 폭력이 지금은 사라진 것일까?

아이가 아이답지 않은 것은 평균적인 경계를 미리 넘어서는 되바라짐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반드시 자연과의 동화가 어른보다 앞서는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올 자가 없다고? 어린아이의 어떤 점을 지적한 것일까? 아이의 마음은 백지와 같아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런 것의 존재조차 모른 채, 그냥 놀이처럼 곤충의 날개를 바스러뜨리며 다리를 떼어내는 게 아닐까?

그것이 너처럼 아파할 것이며, 너처럼 슬퍼할 것이며, 너와 같은 생명이라고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아이의 놀이는 마침내 어른의 삐뚜러진 쾌감으로 자랄 것이다.

알리는 늘 혼자라는 것, 가난 한 집의 홀대받는 아이인데다 말이 없고, 바보처럼 실실 웃기나 하고 코밑에는 늘 누런 콧물을 달고 다니다 들이마시거나 물풍선처럼 터트려버리는 그런 아이와 친구하려는 아이는 없다.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아이라면? 초등학생이면 이미 어른들의 분별로 흐려진 감각을 갖고 있을 것이니. 그렇지만 주인공만이 굳세게 친구의 자리를 지켜나간다. 주인공은 왜 그런 그가 좋았을까? 친구들과 휩싸이는 바람에 훔쳐온 백로의 알을 선물 받은 알리는 어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숲으로 들어간다. 알리는 어떻게 알의 둥지를 찾아내는 법을 알았을까?

늘 천천히 고개 숙이고 걷는 알리에게 이유를 묻자 알리는 제 눈에는 보이는 발아래 살고 있는 온갖 작은 생명들을 일러준다. 이 아이는 이런 모든 것들을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특별히 배운 것이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 신성을 갖고 태어난 다고 하지 않는가.

그 신성이 어른들의 지나친 손길과 간섭으로 흐리게 되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 고요함에 놓일 때, 고요함을 견딜 때, 고요함을 외로움으로 힘들어하지 않을 때, 외로움이 호흡처럼 일상이 될 때 우리가 본시 갖고 나온 맑은 기운이 자신의 주위를 서서히 채우고 자신의 내부에 가득 찰 것이다.

어른들이 쓰는 아이들을 위한 많은 동화가 키를 낮추지 못해서, 눈을 닦지 못해서 부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되듯이 어른이 쓰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작품이다.
작가는 너무 친절하다. 우리는 알리의 죽음을 들으면서 이미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비를 볼 것이다. 그리고 알리가 죽지 않았다는 것도 알 것이다.

털보아저씨가 말해준 독사이야기가 낯이 익다. 마치 이 고을 저 고을에서 만나는 전설의 한 얼굴처럼.
동화처럼 감성에게 호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늘에 가려진 사회적불평등에 우리의 지성의 더듬이를 사용하라고 채근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느낌에 읽는 내내 좀은 불편했던 작품이다.
왕하사란 인물로 대변되는 한 시대도 동화처럼 넘어가기에는 불편한 대목이고 차라리 소설로 나왔더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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