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28) 주천면 신양리(1) … 신광석(난들)

▲ 주천면 신양리 신광석
우리 광석마을은 뒤에는 배골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앞에는 주자천이 감도는 양지바른 곳으로 이조 중엽에 이르러 집단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처음에는 ‘난들’이라 하였다가 후에 ‘광석’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척박한 땅을 일구어 옥토로 가꾸며 근면하게 살아왔다. 새마을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던 1970년대에 이르러 인삼 특작으로 전라북도에서 농가소득이 가장 높은 시범 새마을로 지정받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일제의 폭정과 보릿고개 속에서도 이웃 간에 끈끈한 정을 나누며 미풍양속을 지키면서 한 가족처럼 오순도순 살아온 우리는 삶의 터전이 용담댐수몰지역으로 확정되자 실향의 아픔을 안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전체 32가구 중에서 15가구는 타지역으로 떠나고, 나머지 17가구는 조상의 숨결과 얼이 서린 고향을 차마 떠날 수 없어 옛터나마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탁고개 기슭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이루고 이곳을 ‘신광석 마을’이라 이름하다. 남녘에 살던 새는 남쪽 가지에 깃든다는 진리를 깊이 새기며 오늘, 이 고향 사랑의 뜻이 자자손손 계승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비를 세우다. 1998. 12. 29. <신광석 마을 이주 및 망향 기념비>에서.】

▲ 신광석 마을에서 바라본 용담호. 사진 가운데 물이 있는 부분이 광석이 있던 곳이다. 물론 대부분의 농지도 물 아래 있다. 그 덕에 주민들은 이렇다할 소득원이 없어 늘 걱정 뿐이다.
주천면 신양리(新陽里)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봉양리와 신창리 일부를 병합해 지정된 마을이다. 신양리는 난들(광석), 벌들(금평), 남정자(봉소), 성암 등의 자연마을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는 인삼을 비롯한 특작으로 소득이 꽤 높은 잘 사는 곳이었다. 그러나 용담댐이 건설되면서 난들은 마을과 농경지가 모두 물에 잠겼고, 벌들과 남정자도 일부 농경지가 수몰됐다.
  
◆주민소득 높았던 난들
난들의 한자 지명인 ‘광석(廣石)’은 글자 그대로 ‘넓은 바위’란 의미이다. 이것은 마을 뒤에 넓은 바위가 깔려 있어 붙여진 것이다. 또, 마을 앞쪽으로는 뜰이 넓어 ‘난야(欄野)’라는 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난들 마을은 신양리에서도 소득수준이 높았던 마을로 꼽혔다. ‘난야’라는 지명처럼 마을이 넓은 농경지를 끼고 있었고, 토양이 인삼에 적합해 일찌감치 인삼경작으로 높은 소득을 올렸다. 마을에는 서른 가구가 넘게 살았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해보지 않았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또 인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9년 전이었다. 용담댐을 건설하면서 마을까지 물이 찰 것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주민들은 용담댐 건설을 반대하느라 난생처음 머리띠를 둘렀다. 삶의 터전에서 나가라는 소리는 목숨을 내놓으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 수몰 후 현재의 위치로 이주한 주민들은 마을 이름에 '신'이란 글자를 붙였다. 그리고 조금씩 돈을 모아 마을회관도 지었다. 이제 주민들은 이곳에 모여 알콩달콩 지내며 겨울을 난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결국엔 용담댐이 들어섰다. 마을과 농경지는 모두 물에 잠겼다. 주민들은 난들에서 나와 봉소마을 옆 탁고개 기슭에 새 삶의 터전을 일궜다. 보상받은 돈으로 집을 지었고, 마을 앞으로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도 뚫렸다. 언뜻 보면 산과 물, 새로 지은 집이 어우러져 부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안타까운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용담댐 건설과 함께 진행된 보상 과정에서 자기 땅이 많았던 사람들은 적정한 보상금을 받아 도시로 떠났다. 하지만, 자기 땅이 많지 않았거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주민들은 떠날 수 없었다. 그저 고향이나 바라보면서 살겠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새 터에 집을 지었다. 그랬더니 보상받았던 돈은 어느새 모두 사라졌다.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려 해도 땅을 구하기 어려웠고, 품을 팔고 싶어도 부르지 않으니 생활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도 저 밑에 살 때가 좋았지. 농사지어서 생활하기도 좋았고, 사람이 많아서 재미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쫓겨나와서 집만 덩그러니 지어놓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지금 우리 마을엔 자기 땅에 농사짓는 사람이 없어요.”

마을회관 앞에서 콩을 타작하던 손영순(62)씨의 말이다. 스물한 살에 시집와서 그럭저럭 재미있게 살았는데, 지금은 하루하루 생활비 걱정뿐이다. 가끔 새벽같이 일어나 품을 팔러 가지만, 요즘엔 일이 없어 겨울 날 걱정이 앞선다.
  

▲ 집 앞에 있는 작은 텃밭에서 야채를 기르는 김순임씨. 마을에 농지가 없어 주로 품을 팔러 다닌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엔 그마저도 어렵다. 나이가 들어서 써주지 않기 때문이다.
◆먹고살 길 찾아 주세요
조그만 집 앞 텃밭에서 야채를 기르는 김순임(76)씨는 나이 때문에 걱정이다. 나이가 많다고 품팔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당 3만 원에 타관(다른 마을)으로 일을 나가서 먹고살았는데, 요즘엔 일도 없고 나이 많다고 부르지도 않아요. 나만 그런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 전부 그럴 거예요.”

김순임씨 역시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용담댐 수몰과정에서 땅 조금 있던 것을 보상받아 집을 지었더니 남는 게 없었단다. 현재 마을 주변의 농경지는 모두 다른 마을 사람들의 농지이고, 개간을 하려 해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여기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남은 사람들이라고 보면 돼요.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거나, 이곳에 별장을 지어놓고 가끔 찾아오는 정도죠. 마을 사람들은 그나마 봉소마을 앞에 유휴지가 있어서 그곳에 농사를 짓고 싶어했는데, 얼마 전에 공원으로 만들어버려서 정말 농사지을 곳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요.”

마선옥(56)씨의 설명이다. 지천이 논과 밭이었던 예전의 난들이 그리운지 시선은 마을이 있던 곳으로 향해있다. 그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야속한 용담호 물밖에 없다.
“가끔 물이 빠지면 마을이 있던 곳이 보이기도 하는데, 물이 많이 찼네요.”
  

▲ 마을 약도
◆야속한 도시 사람들
이곳 난들 마을 사람들이 약간의 수익을 올리는 곳이 있다. 옛날 마을의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배골산이다. 이곳엔 송이버섯이 많이 나서 주민들이 이것을 채취해 내다 팔아 적지만 수익을 얻고 있다. 하지만, 요즘엔 그것도 힘이 든다. 대전과 전주, 익산 등 주변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송이를 모두 싹쓸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던 작은 생활비마련도 어려워졌다.

“와서 쓰레기 잔뜩 버리고, 돈이 될만한 것은 모두 긁어가는데 이것을 막을 방법이 없어요. 또 산도 개인소유여서 주민들이 뭐라고 할 수 있는 형편도 못 되고요.”
  길에서 만난 한 주민의 말이다. 주민들이 주변 상황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현실이 답답해서 표정이 굳어졌다.
  
◆100살도 문제 없지
난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김오장(93) 할아버지가 아내 이분희(83) 할머니와 집 마당에서 타작한 콩을 고르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빠른 손놀림이 나이를 잊은 듯했다.

“우리 남편이 평생 병원을 모르고 살았어요. 그랬으니까 이렇게 오래 살지.”
이분희 할머니가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김오장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얘기에 이렇다할 대꾸 없이 조용히 콩만 고르고 있었다.

“아들 둘하고 딸 둘을 뒀어요. 여기서는 큰아들네하고 살고 있어요. 아들하고 며느리가 얼마나 효자, 효부인지 몰라.”
이분희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자식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표정이 없다.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할머니가 능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러더니 이렇게 하면 되느냐고 되묻는다.
“사진을 많이 찍어보셨나봐요?”

▲ 난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김오장 할아버지가 아내 이분희 할머니, 며느리가 가져다 준 콩을 고르고 있었다. 노부부는 효심이 많은 아들네 덕에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했다.

  
◆마을 안전과 평안 비는 거리제
난들 마을에서는 1년에 한 번 거리제를 올린다. 예전 난들 마을에서부터 지내던 것을 이주한 이후에도 계속 지내고 있다.

제를 올리는 날은 음력으로 정월 초사흗날이다. 지금 마을 앞에 있는 멋들어진 소나무 앞에서 지낸다. 상가에도 가지 않고 부정 타지 않는 사람을 제주로 삼아 각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제물로 삼는다. 언제부터 지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리제를 지내는 날은 마을 잔치가 있는 날이나 다름없다.

“마을 앞 소나무는 언제부터 있던 나무인지 아무도 몰라요. 이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고들 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로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소나무가 더 잘 크고 모양도 예뻐졌다고 해요. 지금은 살기 어려워도 앞으로는 마을이 잘 되려 그러나 봐요.”

▲ 주천면 신양리 신광석

▲ 주천면 신양리 신광석

▲ 주천면 신양리 신광석

▲ 주천면 신양리 신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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