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29) 주천면 신양리(2) … 봉소(남정자)

▲ 봉소마을 초입은 수백년된 정자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나뭇잎이 피는 것으로 풍년을 점쳤다고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용담호를 더 파랗게 만들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추워진 날씨 탓인지 파란 하늘이 더욱 차 보인다.

지난 호에 소개한 신광석마을 바로 옆 봉소마을(남정자)을 찾았다. 마을 앞으로 널따랗게 새로 조성된 공원이 펼쳐져 있고, 마을 입구에는 나이 많은 고목이 듬직하게 서 있다. 또 도로 옆 버스정류장에는 간단한 마을 유래도 적혀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마을 곳곳에서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인삼을 심고 차광막을 씌우려 준비하는 주민, 다 자란 무와 배추를 뽑아내는 주민, 경운기를 몰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주민…. 한철 농사는 끝났지만, 이들 농부에겐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 주천 신양 봉소
◆봉이 살았다는 ‘봉소’
봉소(鳳巢)마을의 본래 이름은 ‘남정자(南亭子)’였다. 남씨가 정자를 세웠다고 해서 유래한 남정자란 이름은 후에 마을 뒤에 봉황이 사는 집이 있다고 해 지금의 ‘봉소’로 바뀌었다. 실제 이 마을 뒷산에는 봉혈(鳳穴)이란 명당이 있는데, 이곳 때문에 마을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는 열여덟 집이 살고 있다. 한때는 서른 집이 넘게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젊은 사람들이 떠난 이곳엔 노부부들만 남았다. 마을에 한두 명쯤 있을 법한 어린 학생은 없다. 가장 젊은 사람이 56세라고 하니 마을의 실정을 알 만하다.

이곳엔 용담댐이 건설되고 수몰된 마을에서 이주한 주민들도 여럿 살고 있다. 옆 마을이었던 광석과 물건너 산 아래 있던 복고리 등지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 주민은 여전히 고향 마을이 있던 용담호를 바라보며 속으로 분을 삭이며 눈물을 삼키고 있다.
 

▲ 주천 신양 봉소
◆마을의 안녕 기원하다
봉소마을에서는 산제와 거리제를 꾸준히 지내왔다. 그러다 점차 주민들이 떠나면서 이제는 거리제만 지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산제는 봉소골이라고 부르는 마을 뒤 골짜기 나무 밑에서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지냈다. 제관은 마을 회의에서 정했으며,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3월로 연기했다고 했다.

거리제는 마을 앞 정자나무에서 지낸다.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거리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이면서, 마을의 잔치이기도 하다.

특히, 거리제를 올리는 정자나무는 수령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오래된 나무다. 마을에서는 가지 하나라도 함부로 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는데, 특히 이 나무에 나뭇잎이 피는 것으로 풍년과 흉년, 가뭄 등을 점쳤다고 한다. 현재 이 나무는 2등급 군목으로 지정돼 있다.
 

▲ 봉소마을 맞은편 '도화동산'을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아직 정식개장을 하지 않아 '차량진입 금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이곳은 마지막 농지였다.
◆야속한 도화동산(?)
봉소마을 앞에 조성된 공원은 용담댐이 건설되고 물을 가두면서 홍수터가 된 유휴지 542,151.2m²(16만 4천 평)에 ‘도화동산’이란 이름으로 조성됐다.

2005년부터 조성한 도화동산에는 35억 6천800만 원을 들여 체육시설과 수생식물원, 야생화 단지, 군락 조림 등이 마련됐으며 현재 대부분의 공사가 마무리된 채 정식 개장식을 기다리고 있다. 군에서는 이곳을 마이산과 용담호, 구봉산, 운일암 반일암, 운장산 등 주변 관광자원과 연계하기 위해 조성했다.

하지만, 인근 마을 주민들의 바람은 달랐다. 용담댐 건설로 대부분의 농지가 물에 잠겼는데, 그나마 있던 농사지을 땅이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수자원공사에서는 용담호 오염을 걱정해 유휴지 경작을 금하고 있지만, 친환경 영농활동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허가하는 전례를 봤을 때 이곳은 공원보다 친환경농업 경작지로 만드는 것이 인근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도움이 됐을 것이란 지적이다.

봉소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의 이야기다.
“농지가 모두 물에 잠겨버려서 지금은 품을 팔아 먹고살아요. 버는 게 적으니 조금 먹고, 조금 쓸 수밖에 없어요. 저뿐만이 아니에요. 여기 봉소마을 주민 대부분이 자기 땅을 갖고 농사 짓는 사람이 몇 명 없어요. 차라리 저기 공원을 경작지로 만들어줬으면, 조금이나마 일해서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 도화동산
◆금 많이 나던 광산
봉소마을 뒷산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동굴이 나온다. 예전에 금을 캐내던 금광이다. 한 30년 전까지 금을 캐내다 한 사건이 터지고 문을 닫았다.

“얼마 전에 전북대학교 교수가 학생 둘을 데리고 와서 사진 찍어 갔어요. 무슨 관광지로 개발한다고 하던데.”

젊었을 때 이 금광에서 일했다는 이한수(68)씨로부터 광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스물한 살 때 금광에서 일하다 군에 입대했던 이씨는 전역 후에 아버지와 함께 다시 금광에서 일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이 일곱 명이었단다.

일제 강점기부터 파기 시작한 광산은 그 뒤로도 계속 금을 캐왔다. 오로지 폭약과 손으로 채광했는데, 수평으로 수백 미터를 파고 수직으로 수십 미터를 팠다. 그러다 날망 근처에서 금맥을 만났다고 한다. 허연 돌맹이에 누른 금이 박혀 있는 것을 여러 번 봤단다.

이렇게 캐낸 금맥은 광산 입구 옆에 있는 방아로 빻아서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걸러낸 이 가루는 지게에 담아 마을로 가져와 모아두었다.

▲ 마을 뒷산 금광까지 안내해 준 이한수씨. 이씨는 젊은 시절 이 금광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함께 일하던 타지 출신 광부 하나가 모아놓았던 가루를 모두 가지고 도망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전국 금광을 돌며 같은 짓을 저질렀던 사람이었다. 후에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소재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 뒤로 광산은 문을 닫았다.

“산에 나물하고 약초 같은 걸 캐러 갔다가 잠깐 들러보곤 해요. 손전등을 들고 들어가면 옛날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라요. 지금도 그 안이 생생해요.”

이한수씨는 갱도의 모양을 손짓을 덧붙여가며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파고들어가던 당시 모습도 얘기했다. 그리고 당시에 캐냈던 금이 내뿜던 영롱한 빛깔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대전으로 가져가서 감정을 받아보면,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금반지의 빛깔하고는 차원이 달랐어요. 처음엔 흰색이었다가 열을 가하면 누렇게 되는데, 표면이 거울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이 났어요.”

한참 금광을 얘기해주던 이한수씨가 갑자기 오토바이를 끌고 왔다. 기왕에 온 거 금광을 직접 봐야 한다며 함께 올라가자는 것이었다.

마을 뒤 포장길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갔고, 이후 길은 걸어서 이동했다. 한 20분 정도 걸렸다. 그리고 처음 만난 갱도는 수직갱도였다. 지금은 물이 가득차 있어 안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한 40미터 정도 파고들어갔을 거에요. 와이어(철줄)로 묶어서 오르내렸어요.”
이어서 옆에 있는 수평 갱도로 갔다. 끝을 알 수 없는 갱도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본래는 성인이 똑바로 서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높고 넓은데, 지금은 바닥에 쌓인 것이 많아 조금은 허리를 숙여야 하는 정도다.

“그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 모두 죽었을 거예요. 대부분 아버지 또래였으니까요.”
안타까움이었을까, 그리움이었을까? 이한수씨가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 주천 신양 봉소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도로 옆 작은 채소밭에서 길이순(75)씨가 무와 배추를 뽑고 있었다. 다 자라서 묻어두려고 뽑는 것이란다.
“나는 원래 이곳 출신이 아닌데, 우리 아들이 여기에 집을 사줘서 바깥양반이랑 둘이 살고 있어요.”

길씨는 이곳에서 난 무와 배추를 아들네 나눠주고, 남은 것으로 겨울을 날 것이라고 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수확의 기쁨에 얼굴이 활짝 폈다.

길이순씨 밭 뒤에 있는 인삼밭에서 박영근(68)씨를 만났다. 고랑에 채광막을 씌우기 위해 지주목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저기 복고리에서 왔어요. 거기서도 인삼을 많이 했는데, 배운 게 이것뿐이라 여기에서도 인삼농사를 지어요. 여긴 올해 심었어요.”

당시에 복고리에서 두 집이 봉소마을로 이사를 왔단다. 하지만, 어떤 좋은 곳에 가도 고향마을만큼 좋을까. 고향마을 방향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흔들린다.

마을 안쪽에서는 담을 사이에 두고 송무부(68)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광석에서 이사 왔다는 송씨는 지금도 고향마을만 보면 가슴 한쪽이 꽉 막히는 것 같단다.

“흙 파먹고 살려고 여기에 터를 잡았어요. 조금씩 일해서 먹고는 살지만, 우리 마을은 벌이가 시원찮아요.”
그러면서 용담댐 건설을 반대하며 벌였던 시위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63일간 정말 격렬하게 데모를 했지요. 그러다 교통사고로 두 명이 죽어서 데모를 멈췄어요.”
고향인 광석마을 방향을 촛첨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송무부씨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그때 빼앗겨 물에 잠긴 집과 땅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삶’이었던 것이다.

▲ 인삼밭에서 지주목을 준비하던 박영근씨. 박씨는 물 아래 잠긴 복고리에서 왔다.

▲ 김장담글 배추와 무를 뽑던 길이순씨. 자식들을 나눠주고 남은 것으로 겨울을 날 것이라고 했다.

▲ 마을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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