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성창현씨
성 창 현씨
동향면 대량리 하양지마을 출신
기업은행 동부이촌동지점/지점장
한양대 경영대학원 마케팅전공 36기 회장
재경진안군민회보직(체육담당) 부회장

석가모니(釋迦牟尼) 불타(佛陀)께서 고대 인도의 도시 사위국(舍衛國:우타르프라데시州)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 머물고 있을 때의 그 일화(逸話) 하나. 어느 날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대들이 생사(生死)의 바다에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겪고 거기서 슬피 울며 흘린 눈물과 저 갠지스 강의 물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많다고 생각이 되는가?” 한 제자가 대답한다. “여래(如來)께서 저희들에게 말씀하신 뜻을 생각해 보니 생사를 겪으면서 저희가 흘린 눈물이 저 갠지스 강의 흐르는 물보다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불타(佛陀)께서 조용히 그 제자의 의견에 공감한다.

“참으로 그렇다. 그대의 대답이 틀림없다. 그대들이 생사를 헤매면서 흘린 눈물은 어쩌면 이 갠지스 강의 물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 생사 중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셨을 것이니 거기서 흘린 눈물이 어찌 저 강물의 그 것보다 더 적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하였다.

 불도(佛道)에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슬픔과 눈물이 따르는 고통의 의미를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사고(四苦)에 더 하여,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물질적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고통(求不得苦),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육체가 너무 왕성한 고통(五陰盛苦)을 덧붙여 팔고(八苦)라 하였고, 번뇌(煩惱)가 108이요, 8만4천 번뇌에 대응 한 것이 석가여래(釋迦如來)의 법문(法門)이라 하였으니 우리 인생들이 슬퍼 쏟아내는 그 눈물들이 어찌 강(江) 하나의 물길에 비견(比肩)하겠는가.

 성창현씨. 향리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전주에 유학하였으니 그 때가 겨우 열다섯의 어린 꿈 많은 철부지 소년 이였다. 그는 그로부터 두해 뒤,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듣는다. 어머니의 부음은 그에겐 하늘의 무너짐 이였고, 땅의 꺼짐 이였다.    

인생(人生)의 현실적인 슬픔이, 그리움에 관한 진한 흔적(痕迹)과 모성(母性)으로 향하는 향수(鄕愁)같은 철학(哲學)이 되어 어두운 번뇌(煩惱)의 그림자로 그의 가슴속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정말로 하늘은 무너졌고 땅은 꺼졌었다고 그는 지금 그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의 고향 양지마을은 국사봉(757m)에서 뻗은 줄기가 남서쪽으로 갈미봉을 지나 두억봉 아래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구량천이 흐르고 안으로는 문필봉(598m)이 서 있다. 조선 초기 창녕성씨에 의하여 형성된 집성촌으로 양지쪽에 자리하고 있어 양지마을이다. 이곳에서 성창현씨는 성병선(1993.作故)씨를 아버지로, 허소순(1978.作故)여사를 어머니로 하여 3남2녀의 장남으로 1958년 정월에 태어났다.

동향초등학교와 안천중학교를 거쳐 전주상고를 졸업하는 그 해, 1977년 중소기업은행 11기 공채에 합격하고, 대전지점의 초임행원으로 그의 30년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다. 1985년 1월, 맞선보고 50일 만에 전격적으로 결혼한 임정희(군산.58년생)여사를 건강하고 인근에 소문 난 효녀였던 점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고 그는 그렇게 회고한다.

1988년 종로지점으로, 낮선 서울 땅, 생존경쟁 대열에서의 고된 싸움은 항상 아내의 몫 이였음을 그는 잊지 못한다. 몇 차례씩인지 기억도 할 수 없는 이삿짐을 감당하면서 두 아이의 뒷바라지에  앞장섰던 아내를 생각하며 항상 그는 죄진 마음으로 아내사랑을 잊지 않는다.

삼전동지점에 초임대리로 부임하면서 그는 문득 전주시절, 전주대학2부에 등록까지 마치고도 군 입대 관계로 무산되었던 학업문제를 떠 올린다.

군에서 제대하고 30개월의 공백과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정신적 방황으로 공황상태가 되어 있었던, 그 번뇌를 잡는데 그는 필사적인 변화의 노력이 필요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방송통신대학 경제학과 야간부에 입학하고 학위를 받기까지 5년의 세월.

그리고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원 마켓팅전공 석사과정을 이수하기까지 회고하여 보니 참으로 그에게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의 세월 이였다고 했다.

그리고 2000년도에는 차장으로 승진도 되었고, 2007년 l월에는 그들 사회 은행의 꽃으로 꼽힌다는 지점장에 승진하여 취임하는 그 시간,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방황하는 집안 장손의 비틀려 질 수 있었던 인생길을 걱정하시던 할아버지 내외분의 인자하시던 모습도, 한 마을에 거주하시면서 끊임없이 간섭하며 근심하여주시던 숙부님 내외분도, 네 살 터울, 누나의 자신에 대한 헌신적인 희생도, 몇 업겁(億劫)의 시공세계(時空世界)를 뛰어 건너 우주(宇宙)의 파편(破片)처럼 인연(因緣)으로 다가와서 자신의 35년을 지켜준 그 어머니의 헌신(獻身)적인 마음들이 주마등(走馬燈)으로 머릿속에 다가오고 있었다고 했다.

男兒到處是故鄕 / 幾人長在客愁中 / 一聲喝破三千界 / 雪裏桃花片片紅
장부는 가는 곳마다 곧 고향이거늘/사람들은 시름속의 나그네로 오래도록 보내네/
한소리 큰 할로 삼천 대천세계를 깨뜨리니/눈 속 복사꽃잎이 잎마다 붉네/
                        ―만해 한용운 시인. 오도송(悟道頌)에서―

우리의 고향사람 성창현 씨.
그는 항상 조그만 일에 연연하지 않고, 매사에 낙천적이고 당당하게 살아왔음을 자랑한다. 이야기상대로는 논리적이며, 설득력을 가지고 대인교제에는 오랜 그의 직업의식의 영향으로 상대방에게 편함을 느끼게 한다.

자신이 사랑을 받으려면 상대를 사랑 할 줄 알아야하는 원칙도, 또는 그 사랑하는 방법도 터득해야 하는 이치도 그는 알고 있다.

그는 정년이 끝나면 복사꽃 피어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서 어릴 적 작별한 그 엄마의 묘지 앞에 복사꽃 다발로 넉넉하게 바쳐놓고 그때 어머니와 못 다한 그 이야기들로 도란도란 할 것이란다.         연락처: 011―792-5215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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