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39) 안천면 백화리(마지막) 하리

▲ 하리 마을회관 옥상에서 바라본 마을 모습. 사진 가운데 있는 나무 가운데 앞에 있는 것이 돌쇠라는 사람이 심었다는 버드나무다.
안천면 백화리 삼거리에서 용담댐 방향으로 접어들자마자 보이는 마을이 하배실, 하리마을이다. 풍수지리상 이화락지(梨花落地), 즉 배꽃이 떨어지는 형국인 이곳은 일찌감치 낙안 김씨가 터를 잡은 집성촌이었다.

예전에는 50~60호가 모여 살며 많은 주민이 살았던 곳으로 이웃한 중리마을보다 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노인 인구만 남은 채 많은 주민이 떠나면서, 중리마을보다 인구수와 세대수가 적다. 겉에서 보기에는 주택이 많고 규모가 커보이지만, 막상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면 빈집도 적잖게 눈에 띈다.

▲ 1790년경 돌쇠라는 사람이 심었다는 버드나무. 4등급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낙안 김씨 터 닦은 마을
이 마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 30년 낙안인 김담이 옥천에서 정천면 교동으로 들어와 터를 닦았다. 그리고 그의 작은 아들 성영과 조카 시문이 지금의 하배실로 들어와 터를 닦았다. 낙안 김씨 족보에 따르면 대략 1610~1620년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배실 쪽에는 장수 황씨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낙안 김씨가 하배실에서 점차 세를 불려나가면서 두 마을은 선의의 경쟁관계를 이어갔다.
두 마을은 서원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교육에 힘썼으며 많은 학문적 교류도 이어갔다.
 
마을에 들어서면
하배실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작은 터가 나오는데, 그 가장자리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켰을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 몇 그루와 정자가 있다. 그리고 나무 가운데는 특이한 모양의 노거수가 눈에 띄는데, 나무 밑에는 도지정 보호수라는 것을 설명하는 비석이 있다.

이 나무는 1790년께 돌쇠라는 사람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버드나무인 이 노거수는 높이 20m, 둘레 4.5m, 면적 15㎡로 4등급 보호수이다.

하지만, 이 노거수 상태가 지금은 많이 좋지 않다. 마을회관 주변을 콘크리트로 포장하면서 나무가 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을에서는 오는 봄에 옆 가지를 꽂아 이 나무의 대를 이을 계획이다.

마을회관은 특이하게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작은 편인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비교적 가파르기 때문에 노인들이 이용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마을회관을 지을 당시 마을에서는 1층 건물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의 2층 구조가 됐다고 한다.
 

▲ 김충기씨가 유림들이 양혜공을 기리고자 만든 '통고문'을 펼쳐 보이고 있다. 김충기씨는 이 통고문을 비석에 새겨 세울 생각이라고 했다.
지금은 사라진 당산제
예전 하배실에서는 당산제가 매년 진행됐다. 마을 뒷산에 있는 아름드리나무 앞에 산제당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제를 올렸다. 마을에서는 쌀 1되씩을 걷어 돼지머리와 삼색 과일을 준비해 정월 보름 12시쯤 제를 모셨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에 사람이 줄고 노인들만 남아 지내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기우제도 지냈다. 마을 뒷산 부범실 번덕에서 염소를 잡아 피를 뿌리며 제를 지냈는데, 부녀자들이 챙이를 둘러쓰고 물싸움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면 신통하게도 3일 이내에 비가 왔다고 한다.

마을 앞에 있던 마을 숲도 사라졌다. 나쁜 기운을 막는 수구막이 구실을 하던 이 숲에는 돌탑도 있었다고 하는데, 새마을운동 때 숲을 없애면서 탑도 함께 없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마을숲과 돌탑이 없어지고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의 증언은 조금 달랐다. 당시 마을 숲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잔뜩 있었는데, 해방 후에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에 그 큰 나무가 대부분 부러져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마을 숲 자리는 '숲거리'라는 명칭으로만 남아 기억되고 있단다.

▲ 양해공을 모시고 있는 화천사. 이 화천사를 중심으로 왼쪽에 학륜당, 오른쪽에 관리사가 있다.
양해공 모신 화천사
마을 한쪽에 있는 사당 화천사(華川祠)는 양혜공 죽강 김빈길(襄惠公 竹江 金斌吉) 선생을 모시고, 매년 음력 2월 보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김빈길 선생은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활약한 문무에 능한 인재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태종 때는 병조판서를 지냈고, 세자를 가르치는 사부로도 활약했다.

이런 김빈길 선생은 후에 순조 31년 배향하고 춘추로 향사하기 시작했는데, 화천사에는 영정도 모셨지만 지금은 위패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은 지형을 따라 부정형으로 둘러친 담 안에 자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화천사를 중심으로 동쪽 학륜당과 서쪽 관리인 집이 세모꼴을 이루는 형세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기와 건물이고, 인재를 양성하던 강당인 학륜당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함석지붕 건물로 마루 벽에는 화천사 중수기와 종친회 임원록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이 화천사는 사실 조선 말 서원 철폐가 진행되면서 잠시 폐사되는 위기도 겪었다. 그러다 43년 전 유림들이 결의해 다시 향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배실에 거주하며 낙안 김씨 집안일을 돌보고 있는 김충기(71)씨는 "양혜공을 기리며 만든 '통고문'이란 글을 돌에 새겨 세울 예정"이라며 "양혜공 선생의 학문과 덕을 우리 고장 주민들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또 김씨는 "화천사는 조선 초에 세운 사당으로 문화재로서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아직 지정을 받지 못해 안타깝다."라면서 "우리 고장의 소중한 문화재라는 사실을 주민들이 잊지 말았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 화천사 앞에 있는 '학륜당' 이곳은 낙안 김씨들이 인재를 양성하던 서원이다. 지금은 많이 낡았는데, 마을에서 여력이 없어 손을 대지 못한 채 방치하고 있다.
한편, 하배실에 화천사, 중배실에 화산서원. 이웃한 마을에 각각 서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낙안 김씨와 장수 황씨가 인재양성에 있어 경쟁관계였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을 먼저 이룬 것은 장수 황씨였지만, 서원을 먼저 만든 것은 낙안 김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두 서원은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러나 이런 두 마을의 관계를 단순히 경쟁관계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용담현에 있던 용담향교 도유사(지금의 전교)를 번갈아 지내고 계속 교류했다는 것을 보면 발전적인 경쟁관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 죽산안씨효열비.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약혼한 낭군이 세상을 떠나자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고 한다.
죽산 안씨 효열비
마을로 들어가는 길 한쪽에 담장을 두른 비석 하나가 있다. 이것은 '죽산 안씨 효열비'로 죽산 안씨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죽산 안씨는 김기흠이란 사람과 약혼한 상태였다. 그런데 혼례를 치르기 전 김기흠이 요절한다. 늦은 오후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죽산 안씨는 버선발로 남편이 있는 중배실까지 뛰어왔다고 하는데, 도착한 시간이 새벽이었다.

이미 김기흠과 약혼한 터였기에 낙안 김씨 문중에서는 그녀를 며느리로 삼았다. 그리고 죽산 안씨는 김영규를 양자로 들여 키워 대를 이었다.
 

▲ 2층 구조의 하리마을회관. 2층은 관절이 좋지 않은 노인들에게 무용지물이라고 한다.
철마산에 작은 암자
안천면 삼락리와 상전면 구룡리, 정천면 망화리에 걸쳐 있는 쇠말봉(철마산, 478.3m). 철마를 묻었다고 하는 이 산에는 작은 암자가 있다. 이곳은 물이 좋아 마을에서 공을 들이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암자는 한국전쟁도 무사히 넘기고 잘 버텼는데, 개발독재 시대였던 1970년대에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당시 정부는 간첩이 은거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두 철거 명령을 내렸다.

이때 앞서 소개한 김충기씨가 기지를 발휘했다. 당시 김씨는 산에서 누에를 먹이고 있었는데, 잠실보조로 이용하겠다고 해 철거를 피할 수 있었다.
지금도 누군가가 와서 계속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마을에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했다.

▲ 백화리 하리마을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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