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40)부귀면 세동리(1)

▲ 적내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마을 모습. 마을 앞에 삼보가든이란 식당을 시작으로 꽤 많은 주택이 모여 있다. 실제 거주인구는 많지 않지만, 전주로 떠난 사람들이 고향에서 여전히 농사를 짓기 때문에 진짜 마을 인구는 적지 않다.
부귀면 서쪽 경계에 있는 세동리는 원세동, 적천, 우정, 부암, 신덕 다섯 행정리로 구성돼 있다. 세동리는 남쪽으로 성수면 중길리, 마령면 덕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와 이웃해 있다.

세동리는 본래 진안군 외면 지역으로 길게 뻗쳐 있는 가는 골짜기 지형 때문에 '가늘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였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적천리, 덕봉리, 우정리, 완주군 소양면 우정리를 합해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됐다.

세동리의 여러 자연마을 가운데 우선 적천 적내마을을 찾았다. 쌓였던 눈이 포근한 햇볕에 녹던 지난 2월 27일 오전이었다.

◆10대가 이어진 마을
적내마을이 이뤄진 시기는 1700년경으로 보고 있다. 당시 밀양 손씨, 밀양 박씨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생겼는데, 마을 주위 산이 퉁소 모양 같다고 해 '퉁소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18세기 초에 성립한 마을이니 300년이 넘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입향조부터 10대손까지 이어졌다.
이 마을은 '적내', '적천'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속설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곳으로 진격해왔다고 해 '적래(賊來)'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신빙성이 적다.

마을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인근 지세가 저울 형세인데, 마을 뒷산이 끈이고 원세동 쪽이 저울추이기 때문에 한 마을이 잘 되면 다른 마을은 잘 안 된다는 이야기다.
 

▲ 마을 약도
◆교통의 중심지
본래 적내마을을 비롯한 세동리 일원은 유동 인구가 많은 교통의 중심지였다. 지도를 꺼내 살펴보면 수많은 고갯길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인근 무주와 장수는 물론 멀리 경상도까지 많은 사람이 넘어다니던 길이었다. 그래서 곳곳에 주막이 있었고, 벌이도 괜찮았단다.

지금도 세동리 일원은 교통량이 많은 편이다. 세동리 동쪽에 있는 국도가 많은 교통량을 가져갔지만, 그래도 모래재 터널로 이어지는 세동리 도로는 자동차 통행량이 적지 않다. 세동리를 관통하는 포장도로 가로 많은 식당과 휴게소가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적내마을 역시 주막이 있던 곳이었다. 마을 아래쪽으로 주막 세 곳이 나란히 있었다고 하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들러 끼니를 때우고 탁주로 목을 축이던 곳이었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 하루 묵어가기도 했다. 그만큼 상업이 번성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마을 초입에 있는 '삼보가든'(대표 박근순, 54세)이란 식당과 모래재 터널 아래 휴게소가 마을의 예전 모습을 이어가고 있다.
 
◆사라진 마을전통 아쉬워
물론 이 마을도 여느 농촌처럼 많이 쇠락했다.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자녀 교육을 위해 도시로 가면서 인구가 많이 줄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농촌의 현실이다.

산업화의 정점기였던 새마을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적내마을의 전통 행사가 사라졌다. 이 마을에서는 목신제와 기우제를 지냈다고 전해지는데, 그 맥이 끊긴 지는 한참 됐다.

목신제는 마을과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 축제였다. 본래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당시 마을에서는 느티나무에 금줄을 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마을 앞으로 도로가 나면서 공사에 방해가 된다고 나무를 베어 버렸다. 순수했던 마을 사람들은 개발독재 시대에 반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수백 년 마을 앞을 지켜온 나무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뒤로 목신제는 사라졌다.

기우제는 날망에서 지냈다. 봉화가 있었다고 해 봉화날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돼지나 염소를 잡아 피를 뿌렸다. 명산을 더럽히면 이것을 깨끗이 하기 위해 비가 내린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집집이 수도가 보급되고 지하수를 뽑아 쓰기 때문에 가뭄이란 것을 잊고 있지만, 예전 공동우물을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농사를 지을 당시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을 것이다. 현재 마을 옆을 흐르는 내 옆에 우물이 있다.
 

▲ 적내마을에서 모래재터널로 가는 길
◆전주에서 오가는 사람들
사실 이 마을은 사람이 적은 마을이 아니다. 이 마을의 거주 인구는 16가구에 30명이 넘는다. 그리고 자녀 교육 때문에 전주에 나가 있으면서 적내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도 적지 않다. 농번기가 되면 이들은 마을에 있는 집에서 지낸다고 한다. 이들까지 합하면 인구는 훨씬 많다.

그래서 "숫자만 많지, 마을에 도움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분명 마을 사람은 많은데, 주민이 적어서 행정적 지원에서 후순위로 밀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산짐승 피해 아주 심해

이 마을은 마을 앞 도로 건너편을 주 농경지로 삼고 있다. 벼는 물론 콩, 팥 같은 밭작물을 많이 짓는데, 최근에는 인삼과 꽃나무 같은 특작 비중이 많이 늘었단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보니 산짐승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많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었다. 고라니, 토끼, 멧돼지 등이 아주 많은데, 사냥이 금지돼 있으니 마을에서는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 모래재 터널 아래에 있는 휴게소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약수를 담고 있다.
◆"작은 마을회관 지어주세요"
적내마을의 숙원사업이라고 하면 마을회관이다. 적내마을은 터골(대곡)과 함께 '적천'이라는 하나의 행정마을로 묶여 있는데, '적천마을회관'은 터골에 있다. 문제는 적내에서 터골까지의 거리가 걸어가기에 멀다는 것이다. 게다가 눈이나 비가 오면 노인인구가 대부분인 적내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한다.

"작은 움막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노인들이 터골까지 간다는 게 쉽지 않거든요. 본래 농촌이라는 곳이 겨울에는 회관에 모여 오순도순 따뜻하게 지내야 하는데, 우리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어요. 큰 마을회관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주민 박기순(82)씨는 만나자마자 마을회관을 짓도록 도와달라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겨울에는 주민들이 집밖에 나오지 않으니 마을이 텅 빈 것 같아서 영 좋지 않단다. 그리고 사람이 모여 있어야 마을 발전을 위한 좋은 생각도 나오지 않겠느냐며 마을회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차량 통행량 많은 모래재
적내에서 완주방향으로 죽 올라가면 '모래재'가 나온다. 이곳에는 터널이 있는데,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와 이어진다. 이 터널은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주인공 민우(김상경 분)와 신애(이요원 분)가 헤어지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모래재 터널 바로 아래에는 '모래공원'이라는 공원묘지가 있다. 2006년 9월에 문을 연 이곳은 매장묘 8천 기, 납골묘 3천 기 규모의 대형 공원묘지이다. 이곳이 공사에 들어가면서 인근 마을 주민들과 큰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당시 주민들은 공동묘지 위치선정 및 공사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투쟁을 이어갔다.

이 공원묘지 맞은편에 있는 휴게소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이 전주사람들인데, 휴게소 앞 수도에서 물통에 물을 담느라 아주 분주했다.
이곳은 예전부터 물 좋기로 소문난 약수터로 휴게소에서 마음껏 담아갈 수 있도록 개방을 해 두었다.

이곳에서 만난 한 전주시민은 "물맛이 아주 좋고, 오래 둬도 물맛이나 색이 변하지 않는다."라며 "꼭 이곳에서 떠간 물만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바가지에 약수를 담아 맛을 보았다. 매우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물은 온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살짝 감도는 쌉싸래한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했다.

▲ 모래재터널 아래 모래공원. 주민들은 결정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 우편함. 펜으로 이름을 적어 놨는데, 똑같은 모양의 우편함보다 정감있다.
▲ 적내마을 앞 버스정류장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걸레. 이게 인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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