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48 진안읍 반월리 … (3)원반월

▲ 마을약도
진안의 여덟 명당 가운데 세 번째에 든다는 '운중반월(雲中半月)'의 마을 '원반월(元半月)'을 찾은 것은 6월5일 오전이었다. 가랑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마을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비를 맞으며 밭에서 고구마를 심고 있는 주민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원반월은 마을 뒷산 모양이 반달 같다고 해 '반월'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진안향토문화백과사전에 따르면 조선 말 여산 송씨 등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이뤄졌는데, 지금은 갖은 성씨가 모여 사는 각성바지다.

 옛날에는 150여 가구가 모여 살았던 아주 큰 마을이었다. 진안에서 가장 큰 마을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람이 많이 떠나 70가구 남짓이란다. 그래도 가구수로 보면 여전히 우리 고장에서 가장 큰 마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이 원반월이다.

◆원반월에 들어서면
원반월 초입은 대규모 레미콘 공장이 차지하고 있다. 분주하게 대형 화물차가 드나들고, 공장 주변으로는 많은 승용차가 서 있다.

그런데 이 공장만 벗어나면 전혀 다른 풍경이 나온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마을 숲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수령이 족히 100~2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아름드리 느티나무 수십 그루가 모여 있다. 마을 입구에서 나쁜 기운을 막아내는 수구막이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숲 한가운데에는 정자도 하나 서 있는데, 여름철엔 더위를 잊게 해주는 훌륭한 쉼터다.

예전엔 이 숲에 돌탑이 있었다. 마을 부녀자들이 돌탑에 왼 새끼를 두르고 음식을 차린 뒤 간단히 제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마을 숲 옆으로는 문을 닫은 진안남국민학교가 그대로 있다. 운동장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건설자재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놓여 있다. 건물은 오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았는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다.

 이 학교는 처음 '진안국민학교 반월분교'로 설립했다가 1973년 학생이 늘어 '남국민학교'로 승격해 분리됐다. 그러다 1992년 학생 수 감소 때문에 다시 진안초등학교에 편입하면서 학교 문을 닫았다.(진안향토문화백과사전)
 

▲ 진안읍 반월리 원반월
◆잊혀진 당산제
원반월 당산제는 마을 규모와 어울리게 대규모로 치러졌다고 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기 전까지 이어졌다고 하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은 마을 뒤 '장등'이라고 하는 곳의 소나무에서 제를 올렸다.

제는 음력 정월 초이튿날 밤부터 사흗날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제주는 2~3주 전에 부정타지 않은 사람으로 정했다. 비용은 마을 땅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임대료 명목으로 낸 돈을 이용했는데, 돼지머리와 조기, 명태, 삼색과실 등을 준비한 뒤 3~4명이 장등에 올라가 제를 올렸다.

당산제 다음날이면 마을에서는 대동회라는 큰 잔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농사와 마을 사업에 대한 토론, 이웃집 일을 봐줄 때 지불해야 할 인건비(품삯) 등을 정했다고 한다.

당산제 말고도 마을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삼베실 복지봉(무제탕)이란 곳에서 돼지 피를 뿌리며 지냈다고 하는데, 물론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 진안읍 반월리 원반월
◆효자 기리는 정려
마을 뒤쪽 반월교회에서 멀지 않은 도로 옆에 정려비가 하나 있다. '김상현 정려비'다. 비표(碑表)에는 '김공상려정려비(金公尙鉉旌閭碑)'라고 새겨 놓았는데, 효자 김상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71년 세운 비라고 알려졌다.

김상현은 부친이 연로하여 병세가 악화되자 아침저녁으로 약시중을 들었고, 부친 사후에도 성심껏 여묘살이했다.

1868년 정려가 내려졌는데, '유명조선국효자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김공상현지문 상지오년 무진 십이월 일 명정려(有明朝鮮國孝子 贈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金公尙鉉之門 上之五年 戊辰 十二月 日 命旌閭)'라고 적어두었다.
 

▲ 진안읍 반월리 원반월
◆우리 딸은 국가대표
마을을 둘러보다 밭에 고구마를 심고 있던 한아무(57,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씨를 만났다. "고구마는 비가 내릴 때 심어야 한다."라며 정성껏 고구마를 줄 맞춰 심는 한씨는 자신의 딸이 국가대표 선수라고 말했다.

"우리 딸이 여섯 살 때 뇌성마비를 앓았어요. 그래도 두 다리가 튼튼해서 장애인 육상선수로 활동하고 있는데, 9월에 있을 베이징 장애인올림픽 국가대표가 돼서 훈련하고 있어요."

전민재(32)씨가 한씨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해 온갖 대회에 출전해 메달을 목에 걸었는데, 이번 장애인올림픽에서도 메달권에 드는 것이 유력한 모양이다.

"군수님께 말씀드렸더니, 자동차를 보내주셔서 종합운동장을 오가며 훈련할 수 있었어요."

몸이 불편해도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고, 훌륭한 육상선수로 성장한 딸을 생각하면 정말 자랑스럽다는 게 한씨의 얘기다. 올림픽 경기까지는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훈련장에 가서 한 번 만나볼 생각이라는 한씨는 딸 얘기를 하면서 계속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진안읍 반월리 원반월
◆삼메실 호랑이굴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마을회관에 오랜만에 사람이 들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밭으로 나가려던 사람들은 기다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노인들이 90이 넘어도 동네참견을 다할 정도로 건강해요. 저 양반은 올해 여든넷인데 얼마나 밭일을 많이 하는지 몰라요."

백임순(67)씨가 양소녀(84)씨를 가리켰다. 농담을 섞어 장수마을이란 걸 얘기하기 위해서다.
"삼메실에서 나오는 물이 참 좋거든요. 이 물로 국을 끓이면 맛이 기가 막혀요. 수돗물하고는 차원이 다르죠."

산수동(지소) 뒤 복지봉이 있는 골짜기를 삼메실이라고 부르는데, 주민들은 여기서 나오는 물 덕에 장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난번 산수동 취재 당시 물이 좋아서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었다는 얘기와 연관이 있다.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면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왔어요."
당산제 얘기 도중에 누군가 호랑이 얘기를 꺼내자 순식간에 호랑이 목격담이 이어졌다.
"우리 마을엔 호랑이 보고 놀라서 혼이 나갔다는 얘기가 많아요."

"한 번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가는데, 그걸 본 아저씨가 놀라서 소리치자 호랑이가 다가와서 아저씨를 던졌데요. 아저씨는 다행히 칡넝쿨 있는 곳으로 떨어져 목숨을 건졌는데, 물려간 사람은 죽었데요."
"고사리를 캐러 갔다가 바위에서 쉬고 있는데, 멀리서 자꾸 소리쳐서 내려왔더니 바위 아래 호랑이 굴이 있었지 뭐예요."

"황새밭골도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나 봐요. 한 아저씨가 밭을 가는데, 소가 움직이지 않았데요. 그래서 봤더니 밭 저쪽에 커다란 호랑이가 앉아서 보고 있었데요. 그 뒤로 그 양반은 그 밭에 절대로 안 갔어요."

10여 년 전이라고 주민들이 얘기했지만, 그보다 훨씬 전의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험한 산세와 깊은 골짜기가 이어진 지형을 봐서는 충분히 호랑이가 살았을 거란 짐작이 가능하다.
"지금은 멧돼지가 난리에요. 호랑이가 없어서 그런가 봐요."

▲ 진안읍 반월리 원반월

▲ 진안읍 반월리 원반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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