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54 마령면 평지리 … (2)석교(독다리)

▲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 다녔다고 해 '석교'라고 불린 마을. 지금도 마을에서는 징검다리를 놓아 이용하고 있다.
마령면사무소가 있는 솔안에서 시장터가 있는 평산, 모래가 많이 났다는 모사실을 거쳐 다리를 건너기 전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석교(石橋)'라는 마을이 나온다.

마을은 하천 제방과 이웃해 있다. 마을 길은 제방을 따라 하천과 나란히 이어진다. 그리고 마을이 시작하는 곳에는 나뭇가지와 잎이 풍성한 느티나무가 하천 방향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나무 아래 평상이 한가로워 보인다.
 
돌다리가 있어 석교
마을 안쪽에 넓은 터가 있고, 마을회관과 모정이 마주보고 있다.

모정에는 마침 양봉환(71) 이장이 외손자 하윤(정하윤·3)이를 데리고 나와 더위를 식히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 마을 주민들이 지나면서 하윤이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럴 때마다 하윤이가 귀여운 애교를 펼치면 "까르르" 웃음 소리가 컸다.

양봉환 이장과 인사를 나누고 마을의 유래에 대해 물었다.
"예전에 돌다리를 건너 냇물 건너 경작지를 다녀서 '석교'라고 불러요."

마침 모정 아래에 돌다리가 보였다. 커다란 돌(바위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았다.)과 건축물을 철거하면서 나온 큰 콘크리트 덩어리를 줄지어 늘어놓았다. 징검다리이기는 한데, 발밑을 조심하면서 내딛는 작은 징검다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냇물이 데미샘에서 흘러오는 섬진강 상류에요. 큰 비가 내리면 커다란 돌도 물살에 떠내려가죠. 그래서 1년에 서너 번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다리를 놔야 했어요. 옛날에는 마을에 사람이 많았으니까 그리 힘들지 않았어요. 게다가 함께 모여 마을 공익을 위한 일을 하니까 우애도 좋아지고, 협동심도 기르는 계기가 됐죠."

양봉환 이장이 잠깐 기다려보라더니 마을회관으로 가 잠겨있던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기자를 불러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마을 유래와 마을회관 건립에 관한 글이 적힌 현판이었다.
대략 내용은 이렇다.

"석교는 1430년경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는데, 마을 앞으로 섬진강 상류에 해당하는 큰 냇물이 흐르고 있어 큰 돌로 징검다리를 만들었기에 마을 이름을 '독다리'라고 불렀다. 그러다 1890년경 조선 말기부터 독다리를 한자로 풀이해 지금의 '석교'라는 지명이 됐다."
 

▲ 양봉환 이장과 외손자 하윤이가 더위를 피해 모정에 나와 쉬고 있었다.
물은 과해도 부족해도 문제
우리 고장은 지대가 높고 산지가 많아 마을마다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물론 요즘에는 상수도 시설이 보급돼 물 걱정을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물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생존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석교는 물이 과해서 걱정이었던 마을이다. 일단 석교는 섬진강 상류에 해당하는 냇물과 제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마을이 넓은 뜰 한가운데 있어 큰 비가 내리면 수시로 물이 넘쳤다고 한다. 특히 제방이 터지거나 물길이 막히기라도 하면 마을은 큰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이런 물난리와 앞서 얘기한 돌다리를 엮어 짐작해보면, 석교마을은 끊임없이 물과 싸워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천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그해 농사의 성패가 좌우됐고, 마을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도 하천과 관계된 것이었다.

다행히 10여 년 전을 마지막으로 물난리가 난 적이 없고, 최근에 제방 정비를 마무리해 요즘엔 수해 걱정 없이 살고 있다는 게 주민들의 얘기다.
 

▲ 넓은 공터에 마을회관(왼쪽)과 모정(오른쪽)이 자리하고 있다.
정자나무 40살, 마을회관 10살
마을회관은 올해로 지은 지 딱 10년 됐다. 예전에는 현재 마을회관 옆에 작은 초가집 형태로 있었는데, 도로가 나면서 뜯어내고 지금 위치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약 100m² 규모의 이 마을회관은 겨우내 마을의 사랑방으로 이용하다가, 지금은 날이 더워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문을 잠가 놓는다.

대신 여름철에는 회관 앞 모정이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는데, 모정 주변에 심어놓은 나무 몇 그루 덕에 시원한 그늘이 있어 더위를 식히기에 좋다.

그리고 마을 초입에 있는 느티나무는 30~40년 전 마을에서 일부러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오래된 정자나무나 돌탑, 마을 숲, 전통행사 같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데, 아마도 물과 싸우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게 아닌가 짐작된다.
 

▲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오른쪽 제방을 경계로 하천과 이웃해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이 많아
현재 석교에는 3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그리고 태반은 70세가 넘은 노인들이다. 젊은 사람이라고 해야 50대 한 명과 60대 네댓 명이 전부다.

그런데 가구수는 예전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가구수가 많을 때는 40여 가구였다는데, 수십 년 사이에 10여 가구가 줄었다면 그리 많이 줄어든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상당한 가구가 혼자 사는 노인들이다.

그렇다 보니 예전만큼 크게 농사를 짓지 못한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예전에는 넓은 뜰을 끼고 벼농사를 많이 져 대체로 잘 사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주민 연령대가 점차 높아지면서 지금은 자급형 농사로 많이 축소됐다.

그래도 이 마을엔 자랑거리가 있다. 교사를 비롯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는 자부심이다.
마을이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으면 대체로 자녀 교육에 많이 투자하는 편인데, 이 마을 역시 교육열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교육자가 많이 나왔는데, 열두셋 정도가 된다고 했다.

마을엔 노인만 남고 인구가 줄어가고 있지만, 이 마을 출신으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출향인들은 늘 큰 힘이 되고 있단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와 자기 일처럼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한 노인의 얘기다.

"성씨가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살면서 사이좋게 지내잖아요. 예전부터 인심 좋고 협동심이 좋은 마을이었어요. 지금도 사람들은 서로 허물없이 지내고 있어요."  

▲ 마을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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