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박 선 진 <소설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람은 한사람 몫으로 키워내기에 30 여년이 걸린다 한다. 조기교육이 유행하는 시대니 아마 한 10년 단축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요즘 세대들을 보면 그것도 아닌성 싶다.

그들이 받는 교육의 기간이나 질로 보자면 분명 그래야 할텐데 그게 아닌 듯싶은 것은 아무래도 그 교육의 중심에 무언가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교육하면 책과 학교와 아이들이 거치는 수많은 학원들을 생각한다. 아이들이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이 뭐냐고 물으면 당신은 뭐라 대답하겠는가?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자신들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답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나 답은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학교보다는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행해지던 가르침이 인이 백여 버린 세대다.

밥상머리에서 형제들이 함께 종알대다 들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와 비행은 즉각 징벌을 받곤 했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교육이었다. 그래서 버릇이 없는 아이의 집은 가정이 아니라 '집구석'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어느 새 가정에서 행해지던 교육은 설자리를 잃은것을 실감한다. 시골이라고 다르지 않다. 중학생만 되면 도시로 나가 손님처럼 되어가는 아이들에게 언제 지식적인 교육이 아닌 사회의 조화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책은 현장을 일차 걸러낸 정리와 사고의 응집, 편집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학교는 같은 또래집단의 문화만을 알면 거쳐갈 수 있는, 어떻게 보면 닫혀진 현장이다. 수많은 체험학습이 제 집의 하루 고추 따기를 어떻게 당하며, 한 과정을 뚝딱 잘라 놀이성을 가미해야만 성공하는 현장교육이 어떻게 땡볕속에서 목쉬도록 새를 쫒던 노동의 엄숙함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체험학습의 현장교사로서 무시로 해보는 의문을 나는 병상에서 다시 한다.
순간의 부주의로 생사의 문턱을 넘나드는 순간을 아차 비켜온 나같은 수준의 환자들이 모인 병실은 다시 시끌벅적한 사람 사는 세상이다.

그러고보니 세상의 질서가 더욱 중요해짐을 느낀다. 환우 여섯 명이 함께 자고 먹고 있는 공간은 병실이기에 앞서 그들의 삶터를 옮겨 온 것이다. 그래서 이참에 다시 생각하게 된 게 우리네의 병문안 문화다.
왜 병실에는 꼭 티비가 갖춰 있는 것일까?

그것도 수많은 채널이 다 튀어나오는,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병원에도 각기 다른 단계의 환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거기에 맞춘 시설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음악치료법이 있어 작물에도 그걸 실용하는데 병원은 온갖 소음만 있는 곳이다. 여러 명이 함께 있는 병원의 환자는 괴롭다. 그 여러 명의 각기 다른 라이프 싸이클 때문에.

거기다가 더 괴로운 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생각없는 젊은이들 때문에 더 괴롭다.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도 없게 해야 되고 데리고 왔으면 아이에게 조용한 예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대도 그럴거면 특실을 가지, 병원혼자 전세 냈느냐는 식의 태도에 환자들이 피해 나가는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서로의 배려가 더욱 간절한 곳이 병원이라는 걸 실감한 날이다. 따라서 우리네의 병문안 문화도 달라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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