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59 정천면 월평리 … (2)상초(웃새내)

▲ 마을약도
냇가에 억새가 많아 '새내'라고 부르는 두 마을이 있다. 웃새내와 아랫새내다. 한자로 뜻을 취해 '초천(草川)'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내 천(川)자가 빠지고 위, 아래라는 뜻을 더해 '상초(上草')와 '하초(下草)'라고 부른다.

두 마을 가운데 이번에 찾은 마을은 '상초'다.
진안읍에서 정천리로 접어드는 대목재. 정상에 오르면 장승과 함께 아담한 공원이 잘 정돈돼 있다. 한가위를 앞두고 벌초를 막 끝낸 뒤여서 더 단정해 보인다. 고개를 올라온 자동차 운전자들이 잠깐 자동차를 세우고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여기부터 상초마을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한참을 더 내려가야 하지만, 군데군데 외딴집이 있으니 한 마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도로 아래쪽 농경지에 가끔 보이는 잎이 무성한 노거수도 보기 좋다.

◆나무 터널을 통과하면 마을
대목재 경사길이 끝나는 곳. 왼쪽으로 잎이 무성한 나무 몇 그루가 숲을 이루는 곳이 상초마을 입구다. 꽤 굵은 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며 마주보고 있어 터널 같은 느낌이다. 꽤 보기 좋은 마을 입구다.
왼쪽 물길 건너에는 모정도 있다.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더위를 식힐만한 곳이다.

여길 지나서 조금만 가면 오른쪽으로 완만한 구릉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층층이, 그리고 옹기종기 모인 마을 모습이 아주 정겹다.

마을 중간쯤에 마을회관이 있다. 회관 현관 위에는 마을회관이 문을 연 2006년에 12월 20일 상초마을회관을 준공했다는 기념 현수막이 지금도 걸려 있다.
 

▲ 상초마을 모정. 1년 내내 잠깐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마을 사람들이 농사에 바빠 개점휴업 상태라고 한다. 이런 상황은 마을회관도 마찬가지다.
◆일을 가장 많이 하는 마을
마을회관 앞에서 제초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김병기(62)씨를 만났다. 1980년대 전국적인 냉해피해로 극심한 식량위기에 처했던 시절 이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내가 이장할 때는 마흔 집이 넘었죠. 우리 마을이 규모로 보면 월평리에서 두 번째 정도 됐을 거예요. 아주 못사는 사람 없이 골고루 잘 살았던 것 같아요."

김병기씨는 예전보다는 지금이 더 살기 좋다고 했다. 예전에는 농로 포장도 안 되고 농기계도 없어 농사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한 집이 예전 세 집이 짓던 농사를 지을 만큼 농사 효율성이 높아졌단다.

"우리 마을이 사람 수 대비 농경지 양이 가장 많다고 해요. 그래서 농기계를 많이 쓰는데, 집집이 트랙터가 있을 정도예요. 나도 인삼하고 나락 등을 합쳐서 한 1만 평(3만㎡) 정도 짓고 있는데, 잠깐 쉴 틈도 없을 정도예요.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래요. 그래서 평소에 마을에서 사람 보기가 어렵답니다."

마을 주변은 농경지가 많지 않아 의아했다. 그래서 물어보니 마을 앞을 지나 뒤쪽 골짜기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가면 산 뒤로 꽤 넓은 농경지가 있단다. 그리고 산을 개간해 만든 농경지도 꽤 많다. 그만큼 상초마을은 예전부터 부지런한 마을로 정평이 나 있었다. 1년 내내 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늘 바쁘게 살아가는, 부지런한 마을이 바로 상초마을이다.

"그나저나 요즘엔 산에서 내려온 짐승들 때문에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우리 집은 옥수수밭에 가 보니까 너구리가 전부 먹어치웠더라고요. 고라니는 집 앞에서 살고, 멧돼지는 저 아래 큰길까지 내려갈 정도로 많아요."
 

▲ 대목재 소공원에 있는 장승.
◆무너진 돌탑 이야기
이 마을엔 돌탑이 있었다. 매년 마을 사람들은 이 돌탑에 공을 들이며 복을 빌었다. 그러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그런 전통이 사라졌다. 돌탑은 지금 마을회관 앞에 있었는데, 마을 안길을 넓히면서 허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돌탑과 관련한 재미있는 얘기가 전한다. 그 돌탑에는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가끔 볕이 좋은 날이면 탑 위로 올라가 똬리를 틀고 볕을 쬐었단다.

사람들은 무서워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는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걸로는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돌탑이 무너지고 마을에 큰 사건이 없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자식 먼저 보낸 슬픔
집 툇마루에서 정구지를 다듬고 있던 정귀남(81) 할머니를 만났다.
환하게 웃는 정 할머니의 얼굴은 여든이 넘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생기가 있었다. 귀가 약간 어두운 편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정 할머니는 큰 동네였다가 직장 따라, 학교 따라 많은 사람이 떠난 마을 모습이 여간 안타깝지 않은 모양이었다. 옛날 사람들이 모여 살던 시절이 참 재미있었다고 정 할머니는 회상했다.

지금 정 할머니는 셋째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모두 여덟 남매를 뒀는데, 지지난해 큰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이 이야기를 하며 정 할머니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아들보다 내가 먼저 갔어야 하는데…."

▲ 2006년에 지은 마을회관.
◆멈춘 어버이날 잔치
한 3년 전까지 상초마을에서는 출향인들이 마련한 잔치가 열렸다. 서울과 전주에 나가 살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 매년 어버이날에 모여 고향 어른들을 위해 잔치를 연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전통이 멈췄다. 국가 경제 여건이 나빠진 이유도 있지만, 출향인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나갈 사람이 없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다른 마을에 비해 젊은 사람이 꽤 있는 편인데도, 저마다 많은 농사를 짓다 보니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유가 없으니 마을 안에서 모임도 자주 열지 못하는 것도 좋은 전통이 멈춘 이유이기도 하다.

▲ 마을회관 앞 돌탑이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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