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론>
이 규 홍 <새진안포럼·주천면 무릉리>

11월 3일은 올해로 79돌을 맞는 학생의 날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철없는 일본의 학생들이 조선의 여학생을 폭행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굴욕적인 식민지 교육에 반기를 든 광주의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킨 지 79주년이 되는 날이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 앞에 3000여명의 젊은 학생들이 처벌을 받고 잠잠해졌지만, 민족의 자존감과 자유, 해방을 향한 학생들의 의거는 3.1 운동만큼이나 의미가 큰 민족적 저항운동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해방 이후 1953년부터 11월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해 오고 있는 것이다. 광주일고 교정에는 그날의 의거를 기념하는 탑이 세워져 있는데 당시의 비분강개한 학생들의 마음을 담아 탑에 이런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2008년의 오늘, '피 끓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주문하고 싶다. "학생들아, 너희들을 경쟁과 몰개성의 진흙탕으로 내 모는 세상과 어른들에게 비분강개하라. 그리고 싸워라. 싸워서 빼앗긴 청춘의 아름다움과 자유를 되찾으라."

더도 덜도 말고 1년에 10명 이상의 어린 학생들이 성적과 학교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게 21세기 우리의 교육현실이다. 2MB가 대통령이 되고난 2008년은 어떤가? 이젠 대놓고 교육의 평등화를 깔아뭉개고 있다. 더 기가 막힌 건 이런 현실 앞에서 아무도 실질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뭐 잘못 먹어서 10명 이상이 매년 죽는다면 나라가 뒤집어졌을 게다. 양심 있는 선생님들, 생각 있는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리의 아이들이 저렇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양으로 빌빌거리고 있는데.

점수로 줄을 세우는 그 순간, 교육의 가치와 성과는 사라진다.

데미샘학교(청소년수련관의 방과후학교)에 학교성적으로 치자면 끄트머리에서 오락가락하는 녀석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해 놓은 만들기와 그리기 등을 보며 예술에 대한 탁월한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참으로 귀한 재능이다. 그런데 이 아이의 재능은 성적엔 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별 쓸모없는 그저 '재주'일 뿐이라고 어른들은 생각한다. 점수가 모든 걸 말해주는 세상이니까.

얼마 전까지 '교육부'라는 명칭 뒤에 '인적자원부' 라는 꼬리가 따라붙었었다. 우리사회가 가진 교육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교육은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오직 교육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국가에 필요한 자원을 생산하는 도구도, 출세를 보장하는 수단도 아니라는 말이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가가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이라고 난 알고 있다.

"경쟁이 더 실용적"이라는 한국 vs "경쟁은 경쟁력을 망친다"는 핀란드.
좋은 것만 보면 따라 하기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이 요즘 핀란드의 교육을 흉내 내려고 안달이란다. PISA(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력조사) 결과가 그 이유다.
 
PISA 2006 수학 평가에서 일본 고등학생은 10위를 기록했다. 읽기 능력 평가에서는 14위에 그쳤다. 3년 전보다 각각 4위, 1위씩 후퇴한 결과다.
일본 교육계가 들썩였다. 일본 학생들도 한국처럼 혹독한 입시 교육에 시달린다. 그런데 늘 PISA 1등을 차지하는 핀란드는 평균 학습 시간이 가장 짧다. 또 아이들의 학습 만족도 역시 1위다. 괴로움을 꾹 참고 공부한 일본 학생들이 실컷 놀면서 지내는 핀란드 학생들에게 한참 뒤지는 셈이다. 일본 정부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게 당연하다. [프레시안]

 
그럼 어떻게 공부는 제일 안하는 놈들이 성적은 제일 잘 나오는 걸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애들 공부에 좋은 거라면 별짓을 다하는 우리의 부모들에겐 묘수도 이런 묘수가 없으리라. 답은 간단하다. 핀란드에선 성적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일도 없고 따라서 옆의 짝꿍을 경쟁상대로 보는 일도 없다. 그들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교육의 가치 중 하나가 협동이다. 초등교육부터 모든 학습과정이 혼자가 아닌 팀 단위로 이뤄진다고 한다.

당연히 팀워크가 중요하다. 나 혼자 잘한다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부터 자연스레 협동을 배우게 된다. 공동으로 과제를 수행하면서 먼저 깨달은 녀석(공부 잘하는 놈)은 늦게 깨닫는 같은 팀원(공부 못하는 꼴통)을 설득하고 이해시킨다. 좀 낳은 놈은 지식을 자연스레 나누고 좀 못한 놈은 또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바로 협동이다. 평가가 교육의 본질인양 돼버린 한국에서는 시험을 치르면서 서로에게 답을 가르쳐주는 꼴이다. 나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한국의 교육은 여전히 '경쟁을 통한 우수한 인재육성'을 꿈꾸고 있다. 참으로 무식한 발상이 아닌가? 경쟁에서 살아남은 천재 몇몇이 천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천만 명이 서로 협동하며 잘 사는 세상이 훨씬 아름답고 건강하지 않겠는가? 그런 협동의 마음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들에게 있을 리 만무하다. 오만과 독선, 이기심 말고는 약에 쓸래도 없다. 그러니 같은 노동자들끼리도 '나 살고 너 죽어라' 이러고 싸우고나 있지. 어려서부터 길러진 협동심은 서로를 배려하고 돕는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사실(fact)'이 하나여도, '지식'은 학습자의 수만큼 다양할 수 있다

지난번 하종강 선생의 강의 때 들은 일화를 옮겨본다.
작문시간이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문장의 빈칸을 채우는 문제를 냈다. '내가 ○○학생이지만 교사들의 이유 없는 폭력은 도저히 참아낼 수 없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독자께서는 뭐라고 빈칸을 채우겠는가? 비록? 그런데 이런 답을 써 낸 학생이 있었단다. '씨발'

한참을 고민하던 선생님은 그 학생의 답에 동그라미를 그려주었단다. 왜? 그 말도 틀린 건 아니니까. 지식은 학습자가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완벽하게 객관적인 지식은 없다. '사실(fact)'이 하나여도, '지식'은 학습자의 수만큼 다양할 수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나라의 선생님들이 그걸 몰라서 객관적인 정답 하나만을 고르라는 시험문제를 줄창 내는 건 아닐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숨어있다. 한 문제에 학생 수만큼의 정답이 있다면 무슨 수로 채점을 한 단 말인가? 무슨 수로 성적에 따라 줄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다양성이란 말만 나오면 치를 떠는 우리의 사고방식은 언제쯤 유연해 질 수 있으려나.

79돌을 맞는 학생들에게 다시 한 번 외치고 싶다. '학생들이여, 고리타분한 세상과 어른들에게 속지 말고 봉기하라.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면 이미 젊음이 아니다. 79년 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책상을 뒤집어엎고 교실을 박차고 뛰쳐나오라. 그대들의 미래를 미친 어른들의 손아귀에 맡겨두어선 안 된다. 이미 맛이 간 어른들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젊은 그대들뿐이다. 그대들의 뒤에는 양심 있는 선생님들이 있고 진정으로 그대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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