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65 진안읍 물곡리 … (4)궁동·솟터실

▲ 마을 약도
마을을 찾아다니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정자나무다. 멀리서도 "이곳에 마을이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있는듯하다.

주변 어느 나무보다 높고 풍성한 모습은 당당하고, 마을의 역사를 모두 지켜보고 겪어온 만큼 '나무'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마을에선 정자나무에 공을 들이며 마을과 가정의 평안 같은 소원을 비는 모양이다.

진안읍 물곡리 궁동마을도 그렇다.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멀리서부터 시선을 끄는 나무가 있다. 느티나무다. 누군가는 "늘 티가 나서 느티나무라고 부른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궁동마을 느티나무를 보면 그 말이 정답인 것 같다.

◆넓게 자리 잡은 '궁동마을'
이 마을의 주산은 활처럼 굽은 모양을 한 장골(장곡, 將谷)이다. 그래서 궁동(弓洞)이란 마을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마을은 넓게 퍼져 있는 것 같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주택이 한 무더기 모여있고, 왼쪽으로 몇 채, 오른쪽 골짜기로 여러 채의 주택이 있다. 또 도로 건너편에도 천주교 공소를 비롯한 주택이 몇 채 있다. 넓이로만 보면 진안읍에서도 손으로 꼽을 규모다.

실제 이 마을에는 예전에 일흔 가구 정도가 모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솟터실을 제외하고도 쉰 가구 정도가 있다고 하니 작은 마을이 아니다.

◆솥 만들던 골짜기 '솟터실'
솟터실(소터실, 소토실, 부기곡, 소일곡)은 예전에 솥을 만들던 곳이 있어 '솥점', '솟점' 등으로 부르던 자연마을이다. 지금은 궁동과 하나의 행정리로 묶여 있지만, 거리가 꽤 멀어 한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솟터실은 도로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가 있어 진입로를 알 수 있는데, 진입로를 따라 장수-익산간 고속도로 교량 밑을 지나고 좁은 포장도로를 한참 올라가야 마을이 나온다.
얼핏 보기에도 피난처 같은데, 실제 이 마을은 천주교도들이 핍박을 피해 숨어들면서 이뤄진 마을이라고 한다.

이곳은 한 때 열다섯 가구 정도가 살았더란다. 좁은 골짜기에 집을 지을 터가 많지 않아 예전이나 지금이나 작은 마을이었다. 현재는 열 집이 남아있다.

▲ 진안읍 물곡리 궁동
◆풍년 농사 알리는 느티나무
궁동마을의 자랑 느티나무. 마을 오른쪽 널찍한 터에 당당히 서 있다.
나무 밑 표지석에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했고, 당시 수령이 218년이라고 새겨 놓았다. 기록에는 마을 입향조가 고종 때 광주에서 들어온 이경수라는 사람이었다고 하니, 마을이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심어놓은 나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 나무는 본래 세 그루였다고 한다. 마을 바깥쪽에 나무를 심어 수구막이를 하려 했던 모양인데, 이게 자라면서 한 그루로 합쳐졌다는 것이다. 나무 가까이에서 보면 분명 한줄기 같아, 주민들의 설명이 없었다면 몰랐을 부분이다.

이 나무는 마을의 풍년과 흉년을 알린다고 전한다. 잎이 일시에 피면 모내기도 일시에 해서 풍년이 들고, 부분적으로 피면 모내기가 늦어져 흉년이 든다는 얘기가 있다.

◆성모가 지키는 천주교 공소
궁동마을 도로 가장자리. 넓은 마당을 낀 조립식 건물이 있다. 한쪽에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고, 건물 위에는 십자가가 서있다. 창문은 그림을 그려놓았다. 천주교 공소다.

본래 천주교 공소는 솟터실에 있었다. 지금 솟터실 경로당이 있는 자리가 공소 터였다. 그러다 공소를 궁동마을로 옮겨 지었는데, 천주교 신자가 하나도 없던 궁동마을에 신자가 많이 늘어난 계기가 됐다.

한동안 궁동마을 공소는 솟터실과 궁동마을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올리는 곳으로 유지됐다. 그리고 10년 전쯤 진안읍에 성당이 만들어지고 순환버스를 운행하면서 예배를 올리는 곳으로서의 기능을 중단했다. 가끔 신자들간의 모임이 있을 때만 문을 연다는 게 주민들 설명이었다.

▲ 진안읍 물곡리 궁동·솟터실
◆마을에서 만난 밝은 사람들
천주교 공소 뒷집 앞 텃밭에서 송선녀(62)씨가 파를 거두고 있었다. 김장을 담그기 전에 파김치를 미리 담가두려 한다고 했다. 마을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느티나무 주변에 있는 새 건물과 비석에 대해 물었다.

"건물은 지금 거의 지었는데요. 농산물 직판장으로 사용할 거래요. 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파는 곳으로요. 그리고 그 옆에 비석은 돌아가신 한 아주머니에 관한 건데요. 아들 없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면서 갖고 있던 전답을 마을에 희사했어요. 그래서 마을에서 고마움을 표하고자 세운 거예요."

송선녀씨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느티나무 맞은편 창고건물 뒤 고추밭에서 일하는 최종옥(88) 옹을 만났다. 수확을 마친 고추밭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본래 고향은 죽산리인데, 여기로 온 지 50년 정도 됐네요."
아들네와 함께 산다는 최종옥 옹은 올해 고추농사 성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고 말했다. 날이 가문데다가 벌레가 생겨 상품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최 옹이 거두고 있는 고추모에는 여전히 많은 고추가 달려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벌레가 파먹은 것이 보인다고 했다.

"우리 자식들이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날이 더 추워지면 슬슬 돌아보려고요. 걸을 수 있을 때 많이 돌아보고 싶어요."

▲ 진안읍 물곡리 궁동·솟터실
궁동마을을 나와 솟터실로 향했다. 솟터실 경로당 앞에 도착하니 옆집 마당에서는 일찌감치 김장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배추농사가 잘돼서 김치가 맛있을 것 같아요."
송봉순(71)씨의 표정이 밝다. 몇 포기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양이 많았는데, 외지에 나가 있는 다섯 아들네에 줄 거라고 했다. 김장김치 말고도 농사짓는 것은 대부분 아들네에 주고 있다고 했다.

마당 한쪽에서 고추 건조기를 조작하는 강호상(73)씨. 송봉순씨의 남편이다. 강호상씨는 솟터실이 전쟁 때도 무사했던 피난처라고 설명했다.

"인민군들이 지나가는 길목이 아니어서 전쟁을 무사히 넘겼죠. 그리고 빨치산도 이 마을엔 거의 오지 않았어요. 한 번이나 왔나? 그래서 인근 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많이 피난왔어요."

마을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강호상씨는 마을 안길 확장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인데, 길이 좁고 버스를 돌려 나갈 공간도 없어 성당 버스가 마을까지 들어오지 못해 불편이 크다고 했다. 게다가 마을을 끼고 흐르는 하천이 접해있어 사고 위험도 크다고 말했다.

"우리 마을이 작기는 해도 금방 없어질 것 같지는 않아요. 인심 좋고 아늑한 곳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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