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70 마령면 동촌리 … (3·마지막)금촌

▲ 마을 약도
낙엽이 다 떨어지고 바람이 아주 차도 찾는 사람은 꾸준했다. 드물지만 마이산으로 향하는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여럿 있었다.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운 뒤 사람들은 무리지어 길을 따라 올라갔다.

휴식년제로 등산로를 통제하고 있어도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한 건 금당사와 탑사, 은수사 같은 사찰 때문이다. 마이산의 수려한 경관 속에 자리한 사찰의 모습은 잘 그린 그림 한 폭을 보는 것과 같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금촌을 찾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찬 겨울바람 때문인지 더욱 차게 보이던 날이었다.
 

▲ 금촌 초입에 있는 정자나무
◆원주민은 딱 한 집
화전마을에서 더 올라가면 식당이 밀집한 곳이 나온다. 금촌이다. 지금은 화전마을과 함께 '화금리'라는 행정리로 묶여 있다.

이 마을은 한 때 열 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산골짜기, 게다가 돌이 많은 마이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어서 농사짓기가 아주 힘든 곳이었다. 그런데 마이산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오히려 가구수가 늘었다. 다른 지역에서 장사를 하려고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스무 집 정도가 식당과 기념품 가게를 열어 운영하고 있다.

사람이 늘었다고는 해도 사실 원주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박성열(74)·전이순(70)씨 부부밖에 없다. 부부는 10년째 '토박이 집'이라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 일대 대부분은 절이 소유하고 있어요. 예전 주민들은 절에서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지었죠. 쌀과 콩을 재배했고, 그나마 조금 돈을 만질 수 있는 담배도 많이 졌어요."
식당 안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던 전이순씨를 만났다. 박성열씨는 몸이 좋지 않아 잠을 청하고 있다고 했다.

전이순씨는 옛 마을 모습을 떠올렸다. 먹을 것이 부족해 배가 고파도 오순도순 살아가던 예전이 더 살기 좋았더란다. 지금은 자기네 말고는 모두 외지 사람들이라 예전 같은 끈끈한 정을 찾아볼 수 없단다.
난로 위에 식은 팥죽이 보였다. 얼마 전 동지 때 쑨 것인데, 남은 것을 데우고 있었다.

"시어머니 때부터 동짓날 팥죽을 끓여서 마을 입구 정자나무에 가서 기도했죠. 옛날에는 마을에서 함께 제를 올렸는데, 지금은 저만 혼자 해요."

남부마이산 관리사무소 맞은편에 있는 굵은 나무가 정자나무란다. 본래 두 그루가 있었는데 하나가 죽어 베어내서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았다. 수령이 몇백 년은 됐을 거란다.

전이순씨가 날 추운데 고생한다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6남매 얘기를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특히 열네 명에 달하는 손자·손녀 얘기를 할 때는 얼굴이 더 환해졌다. 명절과 가족 기념일 때면 모두 모이는데, 왁자지껄한 모습이 참 좋다고 했다.
 

▲ 은수사
◆금당사, 탑사, 은수사
상인들이 일찌감치 나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는 관광객들이 잠깐 쳐다보면 내려오는 길에 들르라고 한다.

조금만 올라가면 금당사다. 지붕에 금칠을 해놓아 참 화려하면서도 이국적으로 보인다.
금당사는 조계종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보물 제1266호인 금당사괘불탱(金塘寺掛佛幀)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인 금당사목불좌상(金塘寺木佛坐像),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금당사석탑(金塘寺石塔) 등이 있는 고찰이다.

금당사의 역사는 멀리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 1년(1675년)에 지금 자리에 절을 건립했다고 기록에 전하지만, 백제 말에 무상화상과 그의 제자 김취가 세웠다고 전하는 금동사(金洞寺)가 선행사찰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 통일신라시대 중국 승려 혜감(慧鑑)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는데, <진안군사>는 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본래 금당사의 위치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안지>에서는 '고금당(古金堂)'이란 기록이 나온다. 고금당은 지금 금당사에서 서쪽으로 약 350m 나옹암으로 올라가는 초입 지점에 있는데, 지금도 고금당이라 부르고 있는 곳이다.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지금도 옛 절의 기와 조각이 수습되는데 조선시대의 기와편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처음의 금당사 터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 탑사
금당사를 지나 또 얼마를 올라가면 널찍한 호수가 나온다. 인공 관광호수 탑영제다. 백조 모양을 한 배가 수상 건물에 묶여 있는데, 호수가 얼어 타고 싶어도 탈 수 없다.

탑영제를 지나 부부시비가 나오고, 다시 한참을 올라가면 온갖 모양으로 세워놓은 돌탑이 눈길을 끄는 탑사가 나온다. 주차장에서부터 발길을 재촉해 오르던 사람들이 입구에서 잠깐 멈추더니 탑사의 이색적인 풍경에 놀라움을 토해냈다. 사진기를 꺼내 촬영하는 이들도 많았다.

탑사는 1920년경 이갑룡(李甲龍, 1860~1957)이란 사람이 마이산에 들어와 초가 암자를 짓고 거주하면서 돌미륵불을 안치하고 불공을 드리면서 시작했다. 이갑룡은 승려행세를 하지 않았고, 따라서 절 이름도 없었다. 그저 돌탑이 있다고 해 탑사(塔舍)라 불렀다.

그 후 이갑룡의 손(孫) 이왕선(李旺善)이 한국불교태고종에 사찰등록을 하면서 한국불교태고종 '탑사'라는 이름이 공식화됐다. 탑사에서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조금만 오르면 바로 은수사다. 옛 이름은 '정명암(正明庵)'이다. <진안지>는 '정명암(正明庵)은 금당사의 동쪽 마이산 제일봉의 아래에 있다.'라고 적고 있는데, '은수사'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가 이곳에 왔을 때, 물이 은처럼 맑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은수사 안에는 천연기념물 두 가지가 있다. 줄사철군락(천연기념물 제380호)과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다. 안내판이 있어 찾기 어렵지 않다.

▲ 식당이 밀집한 금촌
▲ 금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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