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의혼비 제막 직전의 모습이다.
"새벽 4시였어요. 갑자기 총을 들고 들이닥치더라고요."
박정순(부귀면 궁항리·76)씨는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마당에 있던 군인들이 그의 가족을 향해 총을 겨누었고, '타당' 소리가 나면서 아버지는 쓰러졌다. 곡식을 뺏기지 않기 위해 갖은 저항을 다 하던 아버지였다.

그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박정순 씨는 겁에 질려 미친 듯 소리 질렀다. 군인들은 정수궁뿐만 아니라 중궁, 상궁마을에서 훔친 식량을 짊어지고 마을과 방공호를 불태운 채 허겁지겁 사라졌다.

마을 주민 송경섭(부귀면 정수궁·77)씨도 그 날의 공포를 잊지 못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송 씨의 어머니는 총을 들고 오는 여자장교에게 고무신과 소를 주고 겨우 목숨을 구했다고 말한다.

59년이 흐른 지난 1일, 진안군 부귀면 정수궁 마을 입구에 '충의혼비'가 세워졌다. 정수궁 마을 어귀에서 열린 '충의혼비' 제막식에는 주민 및 송영선 군수, 군 관계자 등 30여 명이 참가했다.

유족대표 박정순(부귀면 정수궁·76) 씨는 "노환으로 인해 아픈 몸을 이끌고 이 자리에 섰지만 참으로 기쁘다."라며 "억울하게 죽은 혼을 달래줘 고맙다. 진안군민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라고 눈물 섞인 말을 이었다.

송영선 군수는 "한국전쟁 당시 정수궁에서 목숨을 잃은 거룩한 영혼을 기린다."라며 "다시는 이처럼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선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참가한 주민 모두 한동안 침묵했고 어린 시절, 혈육의 참혹한 죽음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정수궁 마을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이 원인이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해병대는 북한군이 점령했던 서울을 되찾았다. 이때가 바로 1950년 9월28일, '서울수복'이었다. 퇴로가 막힌 데다 쫓기기까지 한 북한군은 전국 각지의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우리군 일대 운장산 등에 숨어있던 북한군도 북으로부터 식량보급이 끊겨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배고픔에 지쳐 민가로 내려왔지만 국군에게 우호적이었던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이 와중에 방공호에 숨어있던 주민들도 군인들이 놓은 불에 타죽는 일이 발생했다. 희생자는 모두 106명이었다.

한편, 제막식이 열린 날 마을 주민들은 손수 빚은 떡과 술을 준비해 충의혼비 건립을 위해 애쓴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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