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87 진안읍 가림리5 사인동마을

▲ 85세의 나이에도 힘이 장사인 최춘삼 할아버지

"저기 내려오네. 저 냥반한테 물어봐요. 사진도 찍고. 아, 글치. 그럼, 난 모른다니까"

이승근 이장은 벌써 '모른다'를 네 번째 뇌까린다. 사진을 찍으려 할 때마다 기술 좋게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이의 표정으로 보아 사인동에 관해 알릴 것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천하장사. 지게에 가득 땔감을 얹어 오는 할아버지가 85세라면 당신은 믿겠는가. 사진 좀 찍겠다고 하자 그대로 또 '얼음땡'을 한다.

아니, 아니, 자연스럽게 걸어오시라고 하자 그제야 여유 있는 품새로 걸어온다. 마당에 짐을 부려도 숨 한 번 거칠게 쉬지 않는다. 최춘삼(85)할아버지. 사인동 마을에서 80년을 살았다.

말을 걸려는 찰나 이장이 누군가를 불러 세운다. 모자를 쓴 중이 걸어가다 우리 일행을 보고 내려왔다. 은수암 큰 주지란다. 손에 아기 안듯 뭔가를 들고 서 있다. 생강이 저리 생겼나. 산삼이었다. 장뇌삼. 20년생이다. 뒤꼍에 심었는데 벌써 이리 자라 효자 노릇을 한다. 그이가 떠나고 최씨 할아버지는 또 나를 본다. "뭐에? 어디?" 신문사요 대답을 했더니 가는귀도 먹지 않았다.
 
멧돼지와 산토끼, 마을행
"저짝 골짜기에서 일루 옮겼어. 40채가 넘었지. 암먼. 사람이 으찌나 많이 살았는지 길을 걷다가도 걸려 앞을 못 나갔어. 청년들은 또 우지게 억셌는가 하니, 지금은…."

최씨 할아버지의 말을 따르면 사인동 마을엔 논농사와 담배 농사를 짓는 총각들이 많았다.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삽부터 쥐는 일꾼들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86살인 이웃과 자기만 남아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담배 농사는 진즉 물리쳤다.

동네엔 멧돼지와 산토끼가 내려와 싹을 조금씩 갉아 먹었다. 산뱀이 우글우글 꼬이고, 구렁이가 지붕을 타 난리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지금도 꽃뱀이 습한 '뒤안'을 기어 다니고, 멧돼지는 가끔 내려와 속을 썩인다.

야생동물을 잡지 못하게 하니, 하소연할 곳이 없단다. 끝이 세 쪽으로 갈라진 쇠깃대를 들고 명절엔 동네를 돌았다. 당산제를 지낼 땐 쇠나팔을 불어 동네 사람을 모았다.
 

▲ 마을경모정
쇠깃대 잃고, 빈 집은 늘고
그는 어린 시절, 맞은편 도의산에 올라 '손꼬락'만한 머루와 다래를 실컷 먹었다. 얼마나 맛있던지 옆에 있던 사람이 까무러쳐도 몰랐다. 산이 깊어 나무가 자라고, 머루 다래나무도 시들었다. 시나브로 사람이 죽고, 쇠깃대와 쇠나팔도 잃어버렸다. 빈 집은 늘어만 갔다.

"요즘 것들은 고래 때 사람 일을 몰라. 신식들이 뭘 알겄어. 농사도 모르고. 할아버지의 낯빛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옛일을 생각하듯 '아아' 탄식을 한다. 집은 주인을 닮았다. 집을 잃어버리면 자아도 잃는다. 최씨 할아버지의 집은 꼭 그를 닮았다.

종자를 내려고 말린 노란 옥수수와 붉은 수수가 시렁 옆에 걸려 있다. 손바닥이 까칠해질까봐 빗자루 손잡이 부근에 빨간 장갑을 씌웠다. 비 오는 날은 몸이 추지다. 헛간에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수북하다.
 
시간이 멈춘 마을
'추접시런 얼굴 뭐 하러 찍어. 찍지 마. 최씨 할아버지는 저승꽃 핀 자신의 얼굴을 탓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큼 한 세계가 좁아진다고 했다. 사인동 마을에도 인기척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길 위로 다닥다닥 늘어선 집들 사이로 외양간이 박혀 있고, 집과 사람과 소와 강아지가 뒤섞인 풍경. 느티나무 아래 홀로 서 있는 경모정은 투명한 유리로 된 집이다. 왼쪽, 오른쪽, 다 둘러보아도 동네가 훤히 다 보인다. 사람들이 '꽁'한 구석 없이 트인 모양새가 경모정과 닮았다.

사인동 마을은 옥수동과 한 동네였다. 사인동과 옥산동을 합한 행정리명이 사옥이다. 사인동과 옥수동을 분리하면서 행정 지명이 바뀌었는데, 현재 옥수동에는 집 한 채만 남았다. 사인동은 산이 깔때기처럼 세모꼴로 둘러싸고, 동네는 달걀노른자처럼 둥둥 떠 있는 모습이다.

수많은 산나뭇잎이 마을을 흔들고 사람과 동물들이 쫓고 쫓기는 경주를 벌이지만 한편으로 어우러져 사는 마을. 밤이면 어느 집 굴뚝엔 연기가 피고, 밤새 호롱불이 켜지진 않을까. 사인동의 시간은 그렇게 멈춰 있다.

사인동마을로 향하는 길: 30번 국도를 타고 진안읍에서 은천 마을 가기 전 왼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오면 원가림마을로 향하는 입구가 나온다. 원가림마을을 지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선인 마을이 나오고, 바로 그 윗동네가 사인동마을이다.

▲ 사인동 마을은 도의산 자락에 푹 잠겨있다. 마을 전경
▲ 최씨 할아버지의 장독대. 반들반들 윤이 난다.
▲ 마을경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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