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영의 잡동사니>

아주 겸손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정원에 술자리를 만들고 손님을 모셨다. 때 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보기가 좋자 달을 보며 손님이 말했다.

"오늘은 달이 유난히 밝고 좋군요!"
주인이 손을 비비며 아주 겸손하게 이렇게 말했다.
"뭘요, 변변치 못한 달이라 죄송합니다."

지어낸 얘기라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세상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도 퍽 많다는 사실이다. 겸손이야 미덕이기는 하지만 겸손이 훈련(?)되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겸손을 떨면 어쩐지 위선적인 냄새가 날 때도 있다.

그래서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상대에 대한 지나친 공경은 예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또 공경이 지나치면 겸손이라기보다는 아첨으로 오인될 염려도 있다.

과공(過恭) 때문에 심심찮은 화젯거리도 생긴다. 오래된 얘기지만 1962년 5월 16일 서울시민회관(지금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영화제 마지막 날 시상식에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장군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최우수 극영화상을 수상한 신 감독과 부인이자 여주인공인 최은희씨에게 트로피를 수여하는 순간 최은희씨는 무대 위에서 박정희 의장에게 정성스럽게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하필 5·16 쿠데타 1주년이었던 날 새로이 떠오른 절대권력 앞에 무릎 꿇은 여배우의 모습이 경건하고 아름답게 비춰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역시 "과공은 비례"에 해당되는 풍경이었다.

견마지로(犬馬之勞)라는 말이 있다. 개나 말 정도의 하찮은 힘이란 뜻으로, 임금이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을 비유한 말인데 가끔 이런 말을 써서 사람들의 입술에 오르내리는 경우도 있다.

유신시절 전남대 교수 출신으로 유기춘이란 사람이 문교부장관으로 재직했는데 대통령의 연두순시 때 "존경하옵는 대통령 각하께 소생 둔마(鈍馬)는 삼가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거다. 둔마(鈍馬)란 '능력도 부족한'이라고 풀면 되겠다.

이 말이 보도되자 한동안 세상의 웃음거리, 조롱거리가 되었다.
세상은 그 말을 겸손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아첨으로 받아드린 것이다. 이 또한 과공은 비례에 해당되는 일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잡동사니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벌써 알아챘을 것이다.
며칠 전 전라북도지사가 대통령에 보낸 편지를 청와대가 공개했다. 내용 중 "존경하는 대통령님! 오늘 저와 전북도민들은 대통령님께 큰절을 올립니다.……저와 200만 전북도민들은 대통령님의 훈풍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지루한 장맛비도 한여름 뙤약볕도 저희들에게는 축복처럼 느껴집니다"라고 밝힌 대목은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전라북도의 숙원사업 해결에 적극 관심을 가져주는 대통령에게 도지사로써 얼마든지 감사를 표시할 수 있다. 또 앞으로 원활한 지원을 받기 위해 감사 표시가 필요한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적절한 표현을 써야지 이처럼 군주시절에나 어울릴 용어를 사용하니 3류 코미디를 넘어 아첨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새만금사업은 전라북도민이 모두 찬성하는 사업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사는 200만 전북도민이 다 그런 양 쓰고 있다. 반대하는 도민 측면에서 보면 기가 찰 일이다.

한편 더욱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청와대의 편지공개행위다. 이 편지는 아무리 공적 영역을 담고 있어도 어디까지나 편지이다.
편지를 (여과 없이) 공개한 청와대측의 처사는 예의의 기본도 못 갖췄다 하겠다. 대통령은 행여 군주가 되기를 염원하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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