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김홍이 씨
김홍이 씨
용담면 수천리 하거마을 출신
(주)흥일Re&I 대표
용담초등 53회 동창회 총무
재경용담초등 53회 동창회장 역임
한국건설기술협회 대의원
재경용담향우회 사무국장

한가위 명절은 다가오는데 밝은 달 휘영청 떠 있었던 고향의 가을 밤, 하늘에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고 있었노라면 문득 아주 먼 그 고향의 나라에서 풍금소리에 맞추어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한 개의 음악소리를 들었었다.

「울 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은 하늘을 엄마 엄마 찾으며 날아갑니다. 가을 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시골 집 뒷산 길이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나그네처럼 서럽던 이 노래는 그 김홍이 씨가 아니고 김홍이 씨의 아버지의 그것이었다고 그는 추억한다. 김홍이 씨의 아버지 김진무 옹(구리.84)은 지금 김홍이 씨의 어머니 최옥연(79)여사와 함께 구리시수택동에 거주하면서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수몰되어 용담호에 잠겨간 고향의 악몽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신다.

구리시의 유적지 동구능을 둘러보면서도 아버지는 물속에 잠겨간 고향의 태고정을 떠 올린다. 구리시를 감싸 도는 왕숙천의 뚝방길을 거닐면서도 아버지는 하거천의 그 돌다리에 관한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차산에서 울려오는 고구려의 그 함성을 담은 역사의 메아리도 어찌 용강산의 그것만큼 정다울 수 있겠는가 그렇게 시큰둥해 하신다. 아버지는 용강산에 흩어져 가던 메아리를 따라서 가끔씩 꿈속의 고향을 간다고 그랬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적어준 쪽지속의 시 한편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향수였기 때문이다.

산 첩첩 내 고향 칠백리련만/자나 깨나 꿈속에도 가보고 싶어/용강산에 외로이 뜬 달 고향마을 비추는데/소요대 넘는 황새 슬피 울며/송림 앞 창공을 나르는데/옥천암 저녁 종소리 은은히 퍼지고/산허리 감도는 저녁 너울/바람에 실려 가네. -고향을 떠나와서-(김진무)

김홍이 씨 원래의 고향은 옥거리 상거마을 이였단다. 김홍이 씨는 종종 아버지께서 들려주던 상거마을의 설화에 관해서도 잊지 못한다. 350여년 전(1670여년 경), 인근 양반들의 천대를 받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들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한(恨)으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애초의 마을 이름이 한지골(恨地谷)이였는데 구한말(舊韓末)쯤 상거(上渠)마을로 개칭 되었단다.

언제던가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태고정(太古亭)을 지날 적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족골(恨足谷)이라 탄식했다는 설화가 지금은 용담호에 묻혀진 그 설화로 전하여 올 뿐이다. 김홍이 씨의 마지막 고향 수천리(壽川里) 하거(下渠)마을의 원래 이름도 수박마을로 전해 온다. 어느 때던가 확실치 않는 그 시절 김수박이라 불리는 거인이 이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힘은 장사였던 그가 우둔하기 짝이 없었던 고로 마을 사람들이 멍청이라고 놀렸단다.

화가 난 그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도록 큰 돌들을 마을 핑구재에서 날라 와서 하거천에 돌다리를 놓았더란다. 김수박이 놓은 이 다리가 수박다리가 되었고 그래서 마을이름도 언제부터였던지 수박마을이라 그렇게 전하여 왔다고 한다.

하여튼, 우리의 오늘 그 고향사람 김홍이 씨는 여기서 1954년 9월 경주김씨 충암공파 21대 손으로 아버지 김진무 옹과 어머니 최옥연 여사의 일곱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용담초등학교와 용담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의 리라공업고등학교에 유학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용담 그 고향을 떠난다.

그 후 고향의 수몰로 용담호에 잃어버린 그것과 합한 그의 두 번에 걸친 그 고향의 떠남과 잃음에 관하여 상당히 많이 마음에 남겨진 흔적을 필자는 읽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 해 (주) 대륙건설에 입사하고 5년, (주)효자건설에서의 15년, 군대를 다녀오고, 1983년 황동숙(50.이천)여사와 결혼하여 25년과 21년의 두 아이를 두고, 참으로 평범한 생활인으로 그렇게 살아왔다 하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본 김홍이 씨, 그의 그 인생의 여로(旅路)가 범상(凡常)한 평범(平凡)의 생활인에 머물고 있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서울산업대학교 건축공학과에 2004년 입학하고 세월을 낚는 어부의 마음 이였을까? 가다가 쉬어가고 쉬다가 또 가고 아직도 그는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졸업의 연도는 아직 그도 모른다. 그의 만학에 관한 그 차원의 철학과 도전정신에 관한 그의 마음의 흔적도 조금은 남과 다른 데가 있어 보였다.

2007년에는 (주)흥일Re&I를 창업하고 그 대표에 취임한다. 그 와중(渦中)에서도 여주자영농업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귀농(歸農)을 위한 귀촌(歸村)의 자세를 정리하고 있는 것도 엿볼 수가 있었던 대목이다. 그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의지를 볼 수가 있었다.

우리의 고향사람 김홍이 씨.
그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그의 좌우명으로 제시한다. 그는 부모님에게서 정직과 성실을 가훈으로 전수 받았고 그가 그렇게 살아왔으며 또 그의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왔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지나온 문화와 다가오는 문화의 혼돈(混沌) 속에서도 혼란(混亂)을 착각(錯覺)하지 않으려는 조그마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연락처 : 011-314-7880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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