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김영만 씨
김영만(舊名;永文) 씨
정천면 모정리 모곡마을 출신
「국제승공연합」진안군 단장
주식회사 「일화」 구매과장
「세계일보」 조사위원
광진구통일교회 장로

일제 강점기 1930년대 후반 이 땅에서 살지 못하고 고국을(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쫓겨 가는 이 민족의 마음을 시인 박용철은 이렇게 절규한다.

나 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야 가련다.
아득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골짜기 마다 밭에 익은 뒷 부리 모양/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헤살짓는다/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야 가련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버릴 거냐./나 두야 간다.
 
"북만주, 북간도, 일본 대판 같은 곳으로 실향민을 실고 기차는 떠나갔다."고 후일 이어령 교수는 그의 저서 「흙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그렇게 술회하고 있다.

그랬다. 오늘 우리의 고향사람 김영만씨의 양친(부:김철길. 99, 8, 24몰. 모:길을여. 96, 3, 26몰)께서도 일제 말기 단말마(斷末魔)처럼 죄여오는 조선인에 대한 각종 정신적, 정치적, 재정적, 인종적, 사상적, 종교적 탄압들을 피하여 차가운 북풍이 문풍지에 몰아치던 어느 계절, 태극기 한 장과 무궁화 꽃씨 몇 낱알을 개나리 봇 짐 속에 감추고 남부여대(男負女戴) 북행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 이 후의 눈물겨운 사연들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그냥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었던 그 것들 보다는 조금은 더 혹독했었던 이야기로 기억해 두기로 하자.

「滿洲國興安德總省九來特旗仁和沌保亭家究堡):만주국흥안덕총성구래특기인화돈보정가구보」에서 1939년 8월 25일 멀고 긴 낯선 출생지의 흔적을 안고 태어났다. 김영만 씨가 정말로 낯선 그라기보다는 그의 부모님의 고국에 돌아 온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여름이었다.

우리의 시대적 배경이 그렇다 하더라도 김영만 씨의 일생을 짚어가다 보면 김영만 씨의 두 번의 출향 중 종교적 연유로 인한 그 귀하게 모셔야 하는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지금까지 김영만 씨가 갖고 있는 풍수지탄(風樹之嘆)의 그 여한을 가슴 속에 씻을 수 없는 앙금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의 연약한 모습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김영만 씨는 의성김씨 도곡공파(義城金氏道谷公派) 31대손(孫)이다. 지금으로부터 270여 년 전, 1690여년 경에 조상들이 모정리 원모곡 마을에 터를 이루어 풍년(豊年)을 만끽하는 풍기(豊旗)를 앞세운 조상들이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어우르고 만고풍상(萬古風霜)조차도 다 비껴가며 그렇게 살아왔었다고 김영만 씨는 술회한다. 이러한 고향이 수몰되던 날 아버지의 그렇게도 서러워하시던 그 연민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 아버지의 모습에서 김영만 씨는 조상할아버지들의 면면의 모습들을 읽었노라 그랬다.

고국에 돌아 온 부모님들은 처음 회덕역에서 조그마한 잡화상을 운영하시더니 내 손으로 독립하지 못한 이 나라 해방이후의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것조차 지탱하지 못하고 다시 금산의 외가에 의탁하여 농사에 전념하시더니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피난길을 헤매다가 정착한 곳이 조상들의 고향 모정리 원모곡 마을이었단다.

김영만 씨는 고향에서 정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천중학교 시절 인근에 모범청년으로 인정을 얻는다. 당시 농촌청소년들에게 유행처럼 번져가던 4H클럽의 부회장으로, 야학방의 교사로 농촌운동에도 참여한다. 뜻한바 있어 중학교를 자퇴하고 서울통신강의록으로 단기간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다. 그리고 김영만 씨가 후일 통일교회에 입교(入敎)하고, 선문대학교 목회학과를 마치고 통일교회의 교회장으로 강론 할 때를 생각한다. 가끔씩 인간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일생을 좌우하는 인연 속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찾아오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험하며 살아가는구나, 그랬었다고 김영만 씨는 술회하고 있다.

1963년 9월 15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약칭 통일교)의 경북 의성교회 권오규 전도사가 전도차 원모곡 마을을 찾아든다. "교회를 신령과 진리로 통일하여 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세계를 만듦으로서 하느님의 창조이념을 이 땅에 실현한다."는 그들의 원리강론에 김영만 씨가 동의한 것이다. 부친과의 종교적 갈등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은 김영만 씨의 가계(家系)가 조부 김기순(金祺錞)할아버지가 왜정(倭政)때에도 산에 움막을 짓고 20일 금식기도로, 또는 전답(田畓)을 팔아서 스스로 십일조에 관계없이 재산을 내어 주민들에게 성서와 찬송가집을 보급하며 전도할 만큼 독실한 개신교 쪽의 전도자였었던 때문이었다.

1968년 2월 22일. 인류 대가족사회에 대한 그들의 염원에 따라서 김영만 씨는 윤택순(조치원,37년생) 씨와 430가정으로 만나 슬하에 2남3여와 함께 일가를 이루고 있다.

우리의 고향사람 김영만 씨.
그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탕감법칙(蕩減法則)에 관하여 큰 소신(所信)을 갖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최선을 다 하라고 자녀들에게 교훈한다고 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전심전력(全心全力), 성심성의(誠心誠意)를 다 하라고 강론(講論)한다고 했다. 워런버핏, 록펠로 만큼은 아니래도 항상 적은 나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그는 그렇게 강의(講義)한다고 했다. 그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연락처: 010-4280-9098>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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