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영 신 재경향우회 회장

인간사회가 갖는 가장 아름다운 세속은 그들은 항상 영원한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사회가 갖는 가장 추한 것은 그들이 또한 영원한 동지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영원한 동지도 적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이 함께 살면서 서로 돕는 것은 우리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창조주가 인간을 지으시고 환희와 열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낙원동산을 그들에게 주었는데 인간은 그를 배반하고 타락을 선택한다. 배반과 거짓, 질시와 보복, 그 원죄(原罪)가 인간의 피에 흐르고 있는 동안, 인간을 유혹하는 얄팍한 지혜가 인간의 두뇌에 잠복하고 있는 동안, 인간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머물 것인가. 어느 시절, 암울했었던 그 역사의 시대. 그냥 두었으면 될 것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억 눌러서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권을 양산하고, 민주와 독재라는 극과극의 도전의 역사를 만들어 온, 그 흔적으로 우리의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앙금의 그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슬프게 기억하고 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던 그 기억의 뒤안길을 우리는 이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가끔씩 참으로 흔하게 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안하고 어처구니 없는 범죄들을 접하면서, 어쩌면 이것들은 우리세대의 우리 아이들에게 미쳐주지 못한 우리의 책임임을 절실하게 통감할 때가 많은 것은, 저 아이들에게 우리의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극히 소박한 교훈만큼만 이라도 우리가 해 주었더라면 최소한의 끔찍하고 황당한 오늘의 사회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 아닐까.내가 살아 온 지독히도 가난하고 배고프고, 그렇게도 그들에게서 짓눌리며 무시당하면서 살아 온 그 세월을 행여 내 아이들에게까지 물려 줄 소냐고 몸부림치듯 물려주기 싫은 그것들을 교육으로 일관하였으니 그 아이들이 배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몸에 젖은 부도덕이 그 아이들에게 무슨 수치로 왔겠는가. 망각이나 착각은 그 아이들에게 인고의 값의 의미를 언제 익혔겠는가.배반의 명수가 이 사회에 살아남는 방법임을, 땅투기 잘 하는자가 부귀영화 복 받은자임을, 병역을 기피하여야 출세가도에서 앞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아이들은 우리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 아이들은 교실에서 스승을 각목으로 내려치고, 부모에게는 식도를 들이대며 유산을 강요한다. 이중국적을 취득하여 조국을 떠날 궁리로 나날을 지새운다. 그들에게 군사부(君師父)일체라는 용어란 없다.착복하는 방법도, 훔치는 이치도, 배반하는 전율도, 음해하는 이유도,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그 까닭도, 그리고 이 사회의 부조리한 그 악랄한 모든 방법들도 그 아이들은 우리에게 배워서 또 행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우리 세대는 마치도 그들에게 가르친 그것들이 그들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명분인 것처럼 당당하고 떳떳하게 교훈하지 않았던가.인간은 가끔씩, 참으로 가끔씩 자기최면의 착각 속에서 살아가면서 망각의 늪에서 헤메이며 허우적거리다가 불행 속으로 빠져 들 때가 참 많다.공직자란 관청이거나 또는 공공의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그들은 그 직에 머무는 동안 법률행위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회의 일반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 직에 임명되거나 선출되면서부터 그 직에 상응하는 사회의 신임과 존경을 보장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와 비판과 훗날 역사의 평가로 이어지는 것도 모두 그 이유에서이다.자본주의의 특징은 사유재산이 인정된다는 것이며 그 사유재산의 형성은 보장된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의하여 사회의 도덕관념에 반하지 아니하는 방법으로서야 하며, 그 형성된 재산의 사용권에 대하여도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것이다.욕망이란 무엇을 하거나 가지고자 하는 바램을, 또는 그러한 마음과 부족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의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영혼이, 또는 마음이, 그리고 간절한 바램이, 향수가, 또한 양심이, 이런 것들이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파악 할 수 없다 해도, 그것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인간의 혹시라도 헝클어질 수 있는 질서관념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자본주의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동안,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사회질서와 도덕관념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경제행위로서 얻어진 개인의 재산에 대하여 그 자신 개인의 소유권의 행사에 대하여 그 행위를 아무도 탓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재벌의 총수가, 어느 기업의 회장이, 어느 회사의 사장이, 어느 구멍가게의 주인이 수 천만 CC의 고급승용차가 있어 그 것을 구입하여 타고 다닌다 하더라도 누구라도 그 행위를 탓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이야기다.관용차량관련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직자의 의미와 인간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 할 수도 있을 사항에 대하여 견제하려는 입법의도를 찾을 수도 있다. 다른 것은 다 생략하기로 하고, 차량 등록일로부터 5년이 경과되거나, 12만KM 주행 시란 의미는 그 시점에 교체가능하다는 것 이였지 반드시 교체하라는 강제의무조항은 아니였다. 사회일각에서는 10년 자동차 타기 운동도 있었고, 낮은CC의 승용차를 오랜 세월 이용하면서도 훌륭한 시정을 이끌어가는 자치단체장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회일각의 일반론적인 그 이야기가 왜 내 이야기로 인식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우연의 일치가 가끔씩 인간사회에서 맞아지는 드라마틱한 경우가 있었다 해도 어쩌면 내 발이 저렸던 가슴의 숨겨진 영상은 아니였을지 모르겠다. 또 한번 거듭 강조 하거니와 정치란 인륜적인 질서를 유지하자는 것이라면, 그래서 공자는 2500년 전 이미 법치(法治)보다는 덕치(德治)가 좋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았던가. 탁상공론(卓上空論)은 실천성이 없는 허황한 이론을 말한다.화합도, 일치도, 그것이 탁상공론 이였다면, 일시적으로 관청을 챙기기 위한 인구유입 정책이 또 그것 이였다면 이제 우리 더 늦기 전에 이웃의 발전을 부러워하자. 부러움이 우리의 낙후를 부끄러워 할 때에 우리의 새로운 발전의 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십년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그 긴 시간을 혹시라도 허송한 것은 아닌지 가능하다면 토론해 볼 필요도 있겠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그랬다. 발전과 업적의 틈새에서 자의와 타의의 평행선이 이 사회에 팽배해져 있었던 자가당착(自家撞着)은 없었는지 우리 함께 반성 해 볼일은 아닌지. 이제 갓 난 우리의 장손(長孫)에게는 또 다른 이 할애비의 참되고 부끄럽지 않는 새로운 교훈을 남겨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장손아, 네가 자라서 50년쯤 후에 어느 자리에 추천을 받아서 청문회장에 섰을 때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는 이중 국적 자를 자식으로 둔 적이 없으며, 나의 아내는 땅 투기로 재산을 은닉한 적이 없으며, 나는 병역을 기피 한 적이 없습니다.」고 대답 할 수 있는 공직자가 되거라. 』 이렇게 말이다.그리고 그 장손이 명예롭게 은퇴하여 이 할애비의 묘소에 올라와 함께 놀 수 있도록 우리 지금부터 그렇게 교육하자. 교육(敎育)은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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