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면 봉학리 상항마을 고흥석, 이봉순 부부의 66주년 회혼례

▲ 말없이 이봉순씨의 손을 꼭 잡은 고흥석씨의 손길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1944년 정천면 봉학리 상항마을에 살던 이봉순 씨는 15살 어린 나이에 가마를 타고 망덕마을로 시집을 갔다. 가마 안에 홀로 있던 이봉순 씨는 어머니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슬퍼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처음 보는 남편 고흥석 씨를 보고 또 한 번 울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오니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2010년. 고흥석, 이봉순 씨 부부는 결혼 66주년을 맞는 해이다.
회혼례는 부부의 결혼 60년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조선시대에는 성행했던 의식 중의 하나였다. 과거에는 사람의 수명이 지금처럼 길지 않아 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수명이 아무리 연장되었다고 하나 부부가 66년을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처럼 열렬한 사랑을 부르짖으며 결혼을 해도 10년을 못 살고 헤어지는 세상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살을 섞으며 산다는 일이 어찌 말처럼 쉬운가.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시집 와서 친정 엄마가 제일 많이 보고 싶었어. 그래 혼자 많이 울었지."

그랬던 새색시는 17살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어린 새색시에게 베 짜는 방법도 가르쳐주고, 살림하는 것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워낙 어려웠던 시기였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봉순 씨 고향인 상항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이후 망덕마을은 용담댐 수몰로 고흥석 씨 눈에서 사라지고, 마음에만 남는 고향이 되었다.

"그 때 식구가 9식구였어. 먹을 것은 없고 먹고는 살아야 하고 그러니 남의 집 일하러 많이 다녔지. 그 때 아이들 데리고 다니면서 밥 얻어 먹이고 했어."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자식들 중에 큰 아들이 일하는 도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지금 이 집도 우리 큰 아들이 고쳐준 것인데 내가 지금도 우리 아들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

부모는 죽어 땅에 묻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이봉순 씨의 큰 아들은 가슴에 품어도 모자랄 자식이었을 것이다.
"부부로 살면서 안 싸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살림 하다보면 다 싸우게 되지. 그래도 싸워도 그 때 뿐이여. 오래 가면 안 좋아."
"이제 죽을 날만 보고 사는 늙은이인데 싸워서 뭐 해?"

그러면서 고흥석 씨는 이봉순 씨의 손을 꼭 잡는다.
이제는 최선을 다해 늙었던 서로에게 위안을 주며 살아내자는 부부의 말없는 약속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중략)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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