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면 황금리 가치마을 김한국 씨

▲ 김한국씨 가족
흔히들 발 뻗으면 거기가 고향이라 말한다.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고향처럼 편히 느낄 수 있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타향에서 고향처럼 살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주민들과 향토사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지 못해 연대의식을 형성하지 못할뿐더러 토지 소유 등 지역적 입지 또한 취약하기 때문이다.
 
양계에 인생 몰입
부귀면 황금리 가치마을로 귀농한 김한국(39)씨는 이곳이 고향이다. 전주에서 7년간 직장생활을 했던 그는 1997년 결혼한 직후 경기도로 삶터를 옮겼다. 양계 사업을 위한 이주였다. 양계 경험이 없던 그였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새로운 일을 시작케 했다. 시작부터 양계장을 매입한 그는 본격적인 양계 사업에 몰입했다.

양계장 한 번 둘러보고 방에 들어와 책을 펼쳤다. 모르는 만큼 '현장과 책'이라는 직·간접의 스승에 매달렸다. 전국 어디든 양계업의 대가라 불리는 선배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1년여를 보냈다. 달을 거듭할수록 닭에 대해 지식이 쌓여갔지만 소득과는 멀어져가고 있음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첫째 딸의 분유 살 돈이 걱정될 정도였다. 순간, 현실을 인식한 그는 가장으로서 당장의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양계장을 처분했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다시 나오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큰 마음먹고 시작한 일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이모부의 도움으로 다시금 양계를 시작할 수 있었던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얼마만큼 자리가 잡혔다.
 
안정되자 고향 생각
그런데 이상했다. 양계에 점점 자신이 생기면 생길수록 고향이 떠올랐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가슴을 눌렀다. 그동안 잘 대해주었던 지역 어른들의 만류가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천명과도 같은 울림이 그를 고향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때가 2001년. 아버지가 무척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고향땅에 6,600여 제곱미터(약 2,000여 평)를 구입하여 양계장을 지었다. 건축 경험이 없는 그였지만 직접 짓기로 했다. 처음 양계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감 하나로 밀고 나갔다. 타향이라면 쉽게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막상 양계장을 짓는다고 하니 주위에 있는 선후배들의 도움이 이어졌다. 고마움 속에 양계장이 완성됐다.

전에 있던 곳은 완만한 평지여서 한 번 전염병이 돌면 삽시간이었다. 불안 속에서 양계를 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고향은 달랐다. 곳곳이 산으로 막혀 전염병이 쉽게 퍼지기 힘든 지역이다. 가치마을은 더더욱 그러했다.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고향에서의 양계는 순조로웠다.
 
고향에 묻히리라
고향으로 돌아온 지 올해로 9년차다. 도시에서의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 그였지만 다시 도시로 가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전 농촌이 좋습니다. 단지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이곳에서의 생활 시스템이 마음에 듭니다. 하고 싶은 일을 자기 계획에 따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죠. 도시에서 자영업을 한다고 했을 때, 누가 보조금을 주지는 않습니다. 농사는 자영업에 해당되지만 정책적 보조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곳이 농촌이라 생각합니다."

처음엔 마을 일에 무관심하기도 했지만 도리가 아님을 깨달은 그는 작년부터 마을의 대소사에 적극 나서고 있다. 마을 기금 조성을 위해 매실나무를 심어 도농교류의 물꼬를 트고, 느티나무 묘목을 심어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가꾸도록 뒷받침 했다.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농협 이사가 된 그다. 이를 계기로 지역의 많은 단체를 이끄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자신의 농사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쁘지만 지역에서 맡은 역할에도 소홀치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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