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전상군경 3급 보훈대상자로 진안군 상이군경회 소속되어 감사와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부귀면 세동리 이강호(81세, 사진)씨는 해방전후와 한국전쟁(6.25)을 겪은 역사 속의 산 증인으로 생존해 있다.

 

  “지금도 (6.25)그때 꿈을 꾸곤 하는데 인민군들하고 총과 포탄소리, 육박전을 하는 모습이 생생해요. 잠을 청하고 있으면 악몽을 꾸곤 하는데 그럴때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안식구가 놀래 나를 흔들어 깨우곤 했어요.”

 

  이씨는 한국전쟁 당시 남원경찰서와 진안경찰서에서 경찰관으로 재직하면서 전라남도 여수 반란사건을 진압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인민군이 포상금을 걸고 검거에 주력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씨는 1949년 7월 진안경찰서로 발령받아 장승파출소 소장으로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약탈과 방화 무자비한 인명 사살 등 긴박한 전쟁속에서 치안대 대장으로 추대되어 운장산 지구대  적 출현지역에 출동해 40여회의 전과를 세우다 급기야 청각을 잃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

 

  부귀면 봉암리 소태정 전투에서 인민군과 서로 마주쳐 육박전을 치르고 있는데 박격포 2발이 날아와 옆에 떨어져 파편과 자갈, 흙더미와 함께 인민군이 이씨 위에서 죽어있었다고 한다.

 

  그 날의 사건으로 부상을 당해 전주 도립병원으로 후송, 진료를 받았지만 신경성 난청 증상으로 점점 청각을 상실하게 되어 1952년 6월 경찰직을 사직하고 그 이듬해인 53년 2월에 논산 훈련소에 육군으로 입대해 수도사단 포병사령부 작전과 상황실에서 근무하고 75년 조치원 제32사단에서 만기 전역했다고 말했다.

 

  이강호씨는 지금도 난청으로 삶의 일부를 보청기에 의존하고 있으나 말을 들을 수 없어 글을 써 전달해 대화를 하는 어려움을 격고 있다.그럼에도 이씨는 지역사회 개발에 앞장서 헌신적이고 솔선수범한 효자, 효부상을 수상했으며 봉사활동에 귀감이 되어 사회봉사상, 면민의 장, 모범국가유공자 표창, 행자부장관 표창을 받는 등 주위 사람들로부터 덕망과 존경받을 만큼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또 호국 보훈의 얼을 되살려 1958년부터 수년 동안 6.25기념일을 전후해 장승초등과 부귀초등학교에서 초청 받아 6.25전쟁의 참상을 알려주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반공·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부귀면에 보훈의 상징물이 없어 애를 태우며 행정기관에 수차례 건의하기도 하고, 어려운 형편에 50만원의 찬조금을 내 1998년 충혼탑을 건립하는데 앞장서고 보훈단체 활성화를 위해 매년 친목 행사에 10만원씩 찬조금을 기부하는 등 모범 회원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이강호씨는 “생색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충혼탑 건립에 50만원을 찬조한 금액이 사라져 버렸고 찬조자 명단에도 없어 아쉬운 마음”이라며 “충혼탑 건립을 위해 노력한 대가가 무색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분투하고 공비토벌에 앞장선 공훈자들에게 심신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추천하고 싶다”며 “함께한 소속중대원 한상문, 손용수, 김남석, 박정구, 엄주원, 이성엽, 강찬성, 박종선, 이동일, 장영석, 임팔규, 이형기, 최재칠 등 13명을 심사후 포상 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강호씨가 전하는 한국전쟁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는 2003년 진안문학에 난중일기로 기록되어있다.>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