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7)

1911년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하고 고려 말의 학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전한 북부여기(北夫餘紀) 상(上)에 시조(始祖) 해모수(解慕漱)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술 원년(B.C. 239년)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 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望之若天王郞 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 依熊心山而起築室蘭濱.)”

삼국유사 기이(記異) 고구려(高句麗)편,「국사」고려본기(高麗本紀)의 기록 을 보면,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高)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고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를 가리키며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천(成川)이라 하나 모두 잘못이고 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高句麗本記)제1 시조 동명성왕(始祖 東明聖王)편에 이보다 전에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해 갔으며, 해부루가 늙도록 후사(後嗣)가 없어 근심하고 산천에 제사 지내어 후사를 구하더니, 그가 타고 있는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리므로 돌을 옮기게 하였더니 금색와형(金色蛙(蝸)形)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거두어 금와(金蛙)라 하였으며 그가 장성하매 태자로 세웠다. 후에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잇는다.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 녀는 금와에게 “나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인데 아우들과 놀고 있을 때,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는 자가 집으로 유인해서 정을 통해 놓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부모에게 꾸짖음을 받고 쫓겨나 있다.”고 말한다.

또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고 하였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하여 주몽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해부루와 주몽은 아버지가 다른 형제가 되는 것이다. 즉 해모수는 부여를 세웠고 아들인 해부루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 이후 삼국유사, 삼국사기, 다른 기록 어디에도 해모수는 찾아 볼 수가 없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없다. 해부루는 아들 금와를 얻었고, 해부루는 천제의 자손 해모수가 세울 나라 때문에 부여의 재상 아란불의 주청을 받아들여 가섭원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우고, 그 자리에는 역사에서 사라졌던 해모수가 다시 북부여를 세우는데, 해부루는 금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금와왕은 태백산 우발수에서 유화부인을 만난다. 금와는 유화부인을 궁으로 데려왔고, 그는 그녀를 비로 삼는다. 유화가 아들을 낳으니 이가 주몽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 상고사의 미스터리가 엮여 간다. 금와는 해부루의 아들이니 해모수의 손자가 된다. 유화부인은 해모수의 아들을 가졌으니 금와의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해모수와 유화의 아들이 주몽이니 금와왕은 주몽의 조카가 되는 셈이다.

또 「주림전(珠琳傳)」21권에는 이런 기록도 있었음은 이미 전회(前回)에서 밝힌바와 같다. 즉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시비(侍婢)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마구간에 버렸더니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 않고 살아나 이 아이가 자라서 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적고 있으니 이는 동명제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며, 졸본부여는 북부여의 또 다른 도읍이기 때문에 부여왕이라 하였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이름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편에 주몽이 천신만고로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니 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그 딸을 아내로 주었으며,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이니 한 효원제(漢孝元帝) 건소(健昭)2년, 신라 시조 혁거세21년 갑신년(甲申年)이다.

주몽은 동부여 시절 예씨 부인과 결혼하고 그가 금와왕의 왕자들에게 쫓겨 동부여를 떠날 때쯤에는 예씨 부인은 주몽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며, 그 아이가 고구려 2대왕 유리명왕(瑠璃明王)이다. 주몽은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 소서노와 혼인한다는 삼국유사의 또 다른 기록도 있다.

역사에 따르면 소서노는 졸본부여왕(또는 군장) 연타발의 세 딸 중 둘째로 이미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라는 아들이 (또는 비류와 온조라는 아들이)있지만 우태가 일찍 죽어 혼자 살고 있었다. 주몽은 손주 며느리였던 소서노와 혼인하고 온조라는 아이를 낳는다.

비류와 온조는 이미 소서노가 우태와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기록과 함께 온조는 소서노와 주몽의 사이에서 태어 난 아이라는 기록도 있다. 후일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서 고구려에 나타나고, 그에 밀려서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와 비류백제를, 그리고 협보를 통하여 일본을 세우는데 까지 간섭한 우리 상고사의 숨겨진 여인으로, 주몽 가계의 황당한 일원으로 그렇게 역사에 숨겨져 있다.
/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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